손자병법
"전쟁은 속이는 것이다. (兵者詭道也 병자궤도야)
고로 능력이 있어도 없는 듯하고 (故能而示之不能 고능이시지불능)
군대를 움직이려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며 (用而示之不用 용이시지불용)
가까운 데를 노리면서도 먼 데를 노리는 것처럼 하고 (近而視之遠 근이시지원)
먼 데를 노리면서도 가까운 데를 노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 (遠而示之近 원이시지근)"_1편<시계>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이 ‘속이는 것’이라는 뜻으로 《손자병법》의 시계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전쟁이니까, 극한 상황이니까 살기 위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 특히 양편이 맞서 겨루는 스포츠 치고 속임수가 스며들어 있지 않는 종목은 거의 없습니다. 상대의 허를 찌르거나 예상을 깨는 전략을 쓰지 않는 종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스포츠는 정정당당이라는 이름아래 가려진 속임수로 승패를 좌우하는 대표적인 분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탁구에서 상대가 특정한 동작을 하도록 유도한 다음 허를 찌르는 기술이 있습니다. 공을 상대의 포어핸드 쪽으로 넘기는 동작을 취하면서 손목만 살짝 꺾어서 백핸드 쪽으로 넘기는 거지요. 축구에서도 헛다리 짚기(Stepover)가 대표적인 속임수 기술입니다. 양쪽 다리를 차례대로 원형을 그리며 페인트를 줘서 상대 선수를 속이고 돌파하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속임수가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선수의 몸값을 올리고 흥행과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속임수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마술(魔術 / Magic)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대놓고 속임수라 전제하고 펼치는 공연입니다. 마술은 과거 초자연적인 어떤 신비한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돈을 갈취한다거나 불순한 목적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습니다. 마술이 사기와 다른 점은 사전에 이것이 마술임을 인지시키고 공연하는 것입니다.
실생활에서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도 일종의 속임수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좋은 옷을 입는다거나, 좋은 표정과 좋은 매너를 유지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눈가림이고 속임수입니다. 본래의 모습을 감춘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보는 거지요. 여자들은 대체로 몸무게를 줄이고, 남자들은 키를 높여 속이는 거죠.
그러고 보니 우리들 일상은 온갖 속임수로 가득합니다. 매일 보는 드라마, 영화, 연극도 허구의 가짜입니다.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상업적 가짜 스토리, ‘픽션’입니다. 영화 속의 특수효과도 관객의 눈을 교란하는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생활 전반에서 진짜 현실과 가상현실(假想現實, VR/virtual reality)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가상, 상상의 경계지점이 모호해지는 부분도 생기고 있습니다. 이점에서는 2300년 전 살다 간 장자의 나비의 꿈(호접지몽/胡蝶之夢)과도 생각의 연결점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속임수는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전유물일까요?
아닙니다. 인간 외 다른 생물의 세계에서도 온갖 속임수가 만연합니다. 아귀(anglerfish)가 먹이를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짜 미끼부터 딱새가 다른 경쟁자들을 단념시키기 위해 내는 허위 경보에 이르기까지, 암컷처럼 가장해서 몰래 짝짓기를 하는 수컷 블루길선피시(bluegill sunfish)부터 독이 있는 수많은 생물이나 물속에 있는 다른 대상을 모방할 수 있는 흉내쟁이 문어에 이르기까지, 육식성 개똥벌레가 보내는 가짜 짝짓기 신호부터 겉보기에는 재생된 것처럼 보이는 꽃발게의 가짜 집게발에 이르기까지, 나비 유충이 개미의 보금자리를 침입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학적 의태부터 허물을 벗는 갑각류의 허세에 불과한 위협에 이르기까지 유기체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상대를 속입니다. 카멜레온이 보호색을 바꾸는 것도 생존을 위한 속임수이고, 동물이나 곤충의 세계에서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의 온갖 기이한 행동도 종족 번식을 위한 속임수로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물론이고 인간의 과거와 현실이 이러하니 손자병법에서 손자가 ‘전쟁은 속이는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상 역사적인 유명한 승리의 대부분은 거의 매복, 기습 등 예상하지 못한 지점과 예상하지 못한 때에 들이닥치는 기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속임수, 변칙, 비정상적 상황으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전쟁이 스포츠 경기처럼 정상적으로 어떤 룰에 의해서 치러진다면 전쟁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니겠지요. 그런 신사게임은 스포츠 경기 뿐입니다. 스포츠는 룰을 어기면 실격 패 당하지만, 룰을 어기면 어길수록, 변칙 변화가 많을수록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게 전쟁의 속성입니다. 결국 전쟁의 본질은 흔히 알고 있는 ‘힘’이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스포츠도 전쟁도 상대를 두고 겨루는 거의 모든 경쟁에서 승리의 핵심요소는 속임수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속임수는 더 이상 정의니 도덕이니 따진다거나, 선악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전략의 문제로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요. 이때 속임수의 최종 목표는 승리가 됩니다.
그래서 간혹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양심을 속이는 짓은 절대 할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올곧은 사고방식이고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말을 충분히 공감하고 존중합니다. 그러나 만약 상대가 당신의 정의와 그 순수함을 외면하고 당신을 속인다면 어찌할까요? 그리고, 그 속임으로 인해 당신의 사랑하는 친구, 가족, 회사가 파괴되고 비참하게 몰락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아내, 아들, 딸들이 죽거나 거리로 내몰리게 된다면? 그래도 그냥 계속 양심과 정의만을 주장하면서 바라만 보고 있을 건가요? 그들이 스스로 개과천선하는 그날까지 기다리기만 할 건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착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낙원이 아닙니다. 악하고 속임수에 능한 사람들과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뒤섞여 경기하고 있는 혼돈의 뒤죽박죽 운동장입니다. 속임수에 의해 언제든지 당신이 평소 그토록 경멸하던 자에게 지배당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때 악한 자들에 대한 ‘지피지기’의 대응능력이나 전략이 없다면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정도의 대응전략을 제시해 봅니다.
먼저 상대방이 속임수를 쓸 때를 내가 미리 잘 알고 있어서 잘 피하거나 대처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강력팀 형사가 깡패 수준 이상의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어 힘으로 제압하거나, 무기를 사용하거나, 실력이 다소 모자라더라도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도망갈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충분한 체력이나 재력이 있어 상대의 기습적인 속임수나 사기를 당해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맷집 또는 재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임수에 대한 인지능력(지피지기)은 승리전략인 동시에 방어전략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들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개의 선택지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합니다. 다만 이때 속임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즉, 적극적으로 악용하느냐, 방어적으로 선용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선과 악은 미리 정해지는 게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동기와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항상 변하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자는 속임수를 단순히 사술로 표현하지 않고 궤도(詭道)라는 포괄적인 도(道)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략적 도구로서 기만-교란-회피-기습의 14가지 디테일로 궤도의 로드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때 궤도(詭道)의 최종 목표는 늘 그렇듯이 기습을 통한 승리입니다.
전쟁, 스포츠처럼 눈에 보이는 속임수만 속임수가 아닙니다. 생활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미필적 고의도 속임수입니다. 세상에는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분명히 고의성이 있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 침묵하거나, 속이는 의도를 숨기고 속이는 행위들이 많습니다. 진짜 속임수에 당하는 것보다 선함을 가장한 속임수 같지 않은 속임수에 당하면 더 억울한 기분이 듭니다.
예컨대, 은행 약관이나 보험약관, 신용카드 계약서 등의 깨알글씨는 미필적 고의가 속임수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 면책조항, 유리한 부분은 작은 글씨로 표현해 두고, 고객이 사인하는 부분은 큰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 약관도 많습니다. TV속 홈쇼핑이나 중간광고로 보험상품 판매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광고를 하다 보니, 마치 속사포 랩처럼 상품내용을 말해버리거나, 약관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글씨들로 적혀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상품설명은 마치 랩을 하듯 빠르게 지나가 버립니다.
이밖에도 작은 글씨의 미필적 고의 사례는 수두룩합니다. 영양제나 약품표시, 식품의 원산지 표시 등에서도 불리한 조항을 작게 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경품행사를 광고하면서 응모자의 개인정보가 회사에 제공된다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축소한 회사가 기만적 광고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어 공정위의 시정명령을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그 회사는 경품행사로 712만 명 고객의 주민등록번호, 휴대폰 번호 등 개인정보를 모았고, 그중 600만 건을 국내 보험사들에게 119억여 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광고물에 응모자의 개인정보가 보험사들에게 제공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리지 않았고, 응모단계에서도 개인정보(생년월일, 휴대폰 번호)가 경품행사를 위한 본인 확인, 당첨 시 연락 목적임을 강조한 반면, 개인정보 제3자 제공 부분은 고객이 알기 어려울 정도로 1mm 크기의 작은 글씨로 표시했습니다.
순진하게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검사, 경찰, 교수조차도 보이스피싱 사기에 걸려드는 판에 일반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들의 사기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고 이때 어느 정도그 수법을 알아두어야 사기에 당하지 않습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속이지 않더라도 상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한 지피지기에서 ‘지피’(적을 아는 전략)로 익혀 놔야 합니다. 마키아벨리 말처럼 “천국으로 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옥 가는 길을 잘 아는 것”입니다.
속임수를 바라보는 시선도 중요합니다. 땀 흘리는 수고도 없이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다거나 과도한 수익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유혹은 대체로 속임수, 거짓말, 꼼수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과 자기 내부의 욕망상태를 스스로 가늠하다 보면 점차 속임수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참고 인용 발췌>
1. 칼럼, 전대호, 스포츠는 속임수가 판치는 분야다 https://www.thepingp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69
3. 산타페연구소 속임수연구회, 고기탁 역, 황소걸음, 2012
4. 경향신문, 공정위 “신용카드 약관 깨알글씨 키워라”https://m.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0503031756571#c2b
5. 정홍민기자, 공정위 “신용카드 약관 깨알글씨 키워라”, 경향신문, https://m.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0503031756571#c2b
6. SBSCNBC 김동우 기자, 금융위, 깨알글씨·속사포 보험광고 없앤다 https://biz.sbs.co.kr/article/10000914583
7. 최송목,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 유노북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