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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Aug 03. 2024

엄마, 내가 고른 길 어때요?

6코스, 우리 집 둘째를 닮아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

 

둘째가 말했다. 이번엔 자기가 길을 고르고 싶다고.


나의 두 아이에게는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 글 속에 아이들 실명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편의상 첫째와 둘째 혹은 큰 딸과 작은 딸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나 또한 원가족 내에서 둘째이자 작은 딸이었다. 태어나 7년 동안은 막내로 살아 보기도 했으나 남동생이 탄생하는 순간, 특권처럼 누리던 '막내'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장녀인 언니에게 밀리고, 장남이자 늦둥이인 남동생에게 치이며, 끼인 둘째로 살아내는 건 꽤나 팍팍한 일이었다. 물론 엄마 아빠가 차별을 하셨던 건 절대 아니다. 충분히 많이 사랑해 주셨다.


그냥 끼어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설움과 울분이 존재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 애정을 갈구했지만, 관심을 독차지 하기에는 언니와 남동생의 존재감이 어마무시하게 컸음은 물론이다.


엄마가 되고 보니, 두 아이에게 골고루 사랑을 준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그렇지 않다고 불만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모르는 새, 둘째 아이에게 감정이입을 더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둘째여서 느꼈던 서글픈 감정을 나의 둘째 아이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첫째 아이 입에서 "엄마가 둘째여서 그런지 나보다 동생 편을 더 많이 들어서 속상해!" 이런 볼멘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가족 내의 출생 서열이 개개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 역시 둘째여서 이상하게 늘 억울했고, 언니나 남동생보다 돋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약간의 관종(?)끼도 있으므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 그게 둘째로 태어난 내가 생각해 낸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내가 짠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인정 욕구의 무서움이란.


내가 이렇게 '둘째'로 살아왔던 36년의 세월을 구구절절 이야기한 이유는, 이번 올레길의 주인공을 우리 집 '둘째'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번 올레길은 둘째가 고르고 싶어 했다. 언니가 고른 9코스 올레길을 걸은지 불과 3일 뒤였다. 다리의 피로가 풀리기 전이라 그런지, 아이는 유심히 올레길 지도를 보더니 가장 짧은 길을 택했다.


바로 6코스였다. 나는 둘째가 고른 6코스 길 위에서 둘째에게 더 시선을 많이 주면서 걷기로 다짐했다.



총 길이 11km로 올레길 중에서 가장 짧았던 6코스. 난이도도 별 1개~!




나의 둘째는 작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아주 작게 그리고, 글씨도 작디 작게 잘 쓴다. 조그만 손으로 오밀조밀하게 만들기를 좋아하고, 입도 작아서 아주 조금씩만 베어 물고 오물오물 오래 씹는 편.


나의 작은 딸이라고 소개하기에 손색이 없는 진짜 '작은 딸'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언니가 '군산 오름'이 있어서 9코스를 고른 것처럼, 본인도 '제지기 오름'이 있어서 6코스를 골랐다고 했다. 엄마인 내가 보기에는 제일 쉽고 빨리 끝나는 길을 고른 같지만(?) 모른 척 해주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제지기 오름은 안전상의 문제로 6코스 루트에서 빠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둘째 아이가 원했던 제지기 오름은 그냥 지나가게 되었는데, 혹시 몰라 둘째에게 물어 보았다.


"제지기 오름이 올레길에서 빠져 있네? 그래도 우리 딸이 가고 싶어 했던 오름이니까 올라 볼까?"


"아니아니, 괜찮아 엄마! 올레길 표식이 안내하는 대로만 가야지!"


한사코 괜찮다고, 제지기 오름에 가고 싶어도 6코스 길이 아니니까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던 둘째! 얼굴을 보니 오름에 오르지 않아도 돼서 좋아하는 표정이던데, 그것도 모른 척 해주는 걸로...


내 옆에서 올레길 6코스를 걷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생 그녀는, 우리 집에서 가장 작고 앙증 맞으며 사랑스러운 나의 작은 딸이다.


6코스 시작점까지 걸어가던 길 :) 두근두근 6코스 걷기 시작!




시작점 스탬프를 찍고 걸은지 얼마 안 되어, 그 유명한 쇠소깍을 마주했다.


남편은 6코스를 부지런히 걷기만 바랐으나, 나에게는 이미 출발할 때부터 계획이 있었다. 쇠소깍에서 아이들과 테우를 먼저 탄 후에 본격적으로 6코스를 걸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내 예상대로 쇠소깍에서 테우와 카약을 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차마 타고 싶다는 말도 못 꺼내던 아이들에게 내가 넌지시 먼저 말을 건넸다.


"얘들아, 6코스 걷는 것도 좋은데... 쇠소깍에서 테우 먼저 타고 갈까?"


"와, 너무 좋아!! 사실은 너무 타 보고 싶었어~ 엄마!"


"엄마, 근데 테우가 뭐야?"


"저기 통나무 엮어서 만든 배 보여? 테우는 제주 말로 뗏목을 말한대~ 저거 한 번 타 보자!"


아이들은 주구장창 올레길만 걸을 줄 알았던 오늘의 일정에 예상치 못한 '쇠소깍 테우 타기'가 추가되어 몹시 신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배에서 태어난 자매인데도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근데... 우리 이거 타고 나면 시간 없어서 6코스 다 못 걷는 거 아니야?"


"오늘은 길이 짧으니까 테우 타고 나서 부지런히 걸으면 될 것 같아!"


"오예~ 신난다! 엄마 최고!"


해야 할 일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첫째는 테우를 타고 나면 6코스 완주를 못할까봐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언니가 걱정을 하든 말든, 둘째는 그저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와 같은 부류!


아이들에게는 어차피 그 길이 그 길일 것이었다. 오늘 쇠소깍에서 테우를 타 본다면, 아이들 머릿속에 6코스 길이 즐겁게 기억되지 않을까 싶어 과감히 표를 끊었다.


사실 테우는 엄마가 더 타고 싶었다구! 나는야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엄마^^


쇠소깍에서 카약 타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운 눈빛이 된 아이들!




테우 타기 체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쇠소깍이 있는 하효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고 본인을 소개하신 선장님이 길게 이어진 밧줄을 잡아 당기며 테우를 움직이셨다. 직접 타 본 '테우'는 진짜 수동식 뗏목이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감상하고, 선장님의 입담으로 쇠소깍 지명의 유래 같은 것도 들으니 시간이 잘도 갔다. 중간에 아이들이 직접 밧줄을 당겨 볼 기회도 주셔서, 아이들은 팔힘을 잔뜩 써 가며 테우도 움직여 봤다.


베테랑 사진 작가 같은 선장님 덕분에 아름다운 쇠소깍을 배경으로 가족 사진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쇠소깍'에서 '테우' 탄 일을 더 오래오래 기억할 예정이다.


쇠소깍에서 테우도 탔으니, 본격적으로 6코스를 걸어 볼까?


쇠소깍 테우 타기 체험^^ 아이들이 밧줄을 당기면 천천히 나아가던 신기한 테우~




제주에 몇 군데 없다는 검은 모래 해변을 가진 쇠소깍 앞 바다!


방금 타고 내린 테우 선장님께서 꼭 한 번 들렀다 가라고 자신 있게 소개해 주신 쇠소깍 앞 바다! 제주에 몇 군데 없다는 검은 모래 해변이라는데, 그냥 지나치면 섭섭할 것 같아 잠깐 구경해 보기로 했다.


오전 11시쯤 되었을까,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바다가 한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윤슬이 내린 바다, 그 앞에서 파도와 장난치는 아이들,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 모든 게 뒤섞여 절묘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중이었다.


잠깐만 구경 하기로 해놓고, 아이들과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다를 감상했다. 제주 바다는 사람의 마음을 계속 끌어 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4월이라 바닷물이 차가워서 수영할 시기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아이들은 바닷물에 풍덩 빠지고 싶어 난리였다. 그렇다면 엄마인 나는 또 공수표를 던질 수밖에...ㅠㅠ


여름에 더워지면 여기 쇠소깍 해변으로 물놀이 오자!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쇠소깍 앞 바다 :)




바다에서 계속 놀겠다는 아이들을 겨우 달래, 길을 나섰다.


바다에 뛰어 들지도 못하는데, 바다는 계속 아이들을 유혹하며 길 왼쪽으로 쭉 펼쳐졌다. 하효항의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그리고 저 멀리 납작하게 솟은 '지귀도'까지, 기가 막힌 풍경의 연속이었다.


"와... 바다랑 하늘이랑 너무 예쁘지 않아? 어쩜 이렇게 맑고 파랗지?"


엄마인 내가 계속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 통에, 안 그래도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힘들어 하던 아이들은 동시에 빼액-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맨날 보는 바다, 다 거기서 거기지! 엄마는 뭐가 예쁘다고 또 사진을 찍어?"


"엄마~ 이제 그만 좀 찍고 가자!!!"


이게 바로 아이들과 올레길 걷기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풍경마다 감탄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아이들은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해서 쉬고 싶을 뿐이라 풍경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 엄마랑 같이 안 걸을래! 아빠랑 갈 거야~"


심지어 이번 6코스 길 위에서는 둘째와 자주 나란히 걸으며, 둘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고 싶었는데! 아, 나의 둘째는 엄마와 감성 주파수가 맞지 않아 아빠에게로 가버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어쩝니까, 진짜 6코스 길이 너무 예쁜데 말입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증거!

 

하효항의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저 멀리 지귀도라는 섬 하나!
조금 더 걸어가면 '게우지코지'라는 멋진 곳이 나옵니다!


게우지코지 : 툭 튀어나온 암석 지형이 마치 전복의 내장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곳


게우지코지 밴치에 앉아서 간식을 먹으며 한라산과 바다를 보며 한참을 쉬었다. 다시 힘내서 걷기 시작마자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저건... 우리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아이들 키보다 훨씬 큰 소프트 아이스크림 모형을 보자마자 같이 걷고 있던 첫째가 옆으로 가서 포즈를 취했다. 첫째 아이 사진을 찍어주고 난 뒤, 내가 바로 한 일은? 둘째 아이 찾기!!!!


왜냐하면 우리 둘째는 분명 "왜 언니만 사진 찍어줬어?"라고 원망 가득한 눈으로 따져 물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사진 찍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언니만 사진 찍어주는 건 왜 용납을 못하는 건지...


그러나 간식을 먹고 뒷처리가 늦어진 건지, 남편과 둘째는 한참 뒤에 있었다. 마음은 둘째를 기다렸다가 아이스크림 모형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지만, 첫째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둘째는 멀리서도 엄마가 언니만 사진 찍어주는 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더란다. 어쩐지, 둘째를 기다리고 싶더라니!


센스 있는 남편이 둘째도 아이스크림 모형 옆에 세워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기는 했다는데, 다시 만났을 때 둘째는 이미 '언니 사진만 찍어준 엄마'에게 잔뜩 삐친 모습이었다.


둘째는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언니에 대한 질투심이 많은 아이였다.


(좌) 엄마가 찍은 첫째 / (우) 아빠가 찍은 둘째




둘째는 험한 길을 걸어야 할 때마다 내 손을 놓고, 아빠 손을 잡으러 간다.


이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둘째가 21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왼쪽 넷째 발가락이 심하게 부러졌다. 둘째를 낮잠 재우고 조심히 나오다가 거실에서 발라당 넘어졌는데, 하필 그렇게 됐다.


걷지도 못할 만큼 통증이 심했던 발가락은 인대도 끊어지고 뼈도 부러진 상태여서, 수술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술한 발가락엔 철심이 박혀서 외관상으로도 보였고, 나는 집에서도 6주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했다.


나는 둘째가 안겨 들려고 할 때마다 "오지마!!!!"라고 소리를 지르는 나쁜 엄마가 되었다. 뭣모르고 달려오는 아이가 자칫 잘못해서 내 발가락을 치거나 밟으면 정말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발가락으로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면 끔찍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물론, 다시 재수술해야 할 지도 몰라 발가락을 절대 사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가장 협조를 안 해주는 게 어린 둘째였다.


그 가엾은 것은, 엄마에게 힘껏 달려들지도 못하고 자주 엄마 품을 거절 당했다. 어쩌다 가끔 엄마에게 안겼을 때조차 눈치가 보였던지, 아이는 점점 엄마에게 다가오는 것을 꺼려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재활에 힘써서 다시 고통없이 걷게 되기까지는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외출할 때마다 어린 둘째는 보호자의 손을 잡아야 했는데, 아이는 절뚝이며 걷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아빠 손을 잡고는 했다.


아이에게 엄마는, 자신의 손을 맡길 만큼 든든한 보호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부분 아빠 손을 잡고 가버리는 둘째, 나는 올레길 위에서 거의 첫째와 짝꿍이다.




덕분에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걷는 법을 터득한 아이!


발을 자주 다쳐 걸음이 영 불안한 엄마를 둔 아이는, 혼자서도 잘 걷는 법을 터득하며 자랐다. 불과 몇 달 전에는 빙판길을 함께 걷다 나만 발라당 넘어지게 되었는데, 둘째가 잽싸게 내 손을 놓는 게 느껴졌다.


"휴~ 하마터면 엄마랑 같이 넘어질 뻔 했네! 내가 손 잘 놨지?"


"아고, 엄마만 넘어지길 다행이다..ㅠㅠ 잘했어 우리 딸!"


큰 길의 한복판에서 넘어져 아프고 쪽팔리는 와중에도 딸의 민첩함에 감탄했다. 옆 사람이 넘어지는 와중에도 중심을 잘 잡고 버틴 게 대단하고! 무엇보다 균형을 못 잡는 나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엄마인 나는 잦은 발가락 골절을 경험한 탓에 불안하게 걷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언니는 선천성 고관절 탈구로 인해 수술 받은 이후로 약간 기우뚱하게 걷는 사람이었다.


걸음이 어설픈 엄마나 언니와는 달리, 씩씩하게 잘 걷는 우리 둘째. 잘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대견한 아이였다. 그러니 만 7세의 나이에 한라산 정상을 두 번이나 오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잘 걸어줘서 고마워! 크게 아픈 데 없이 잘 커준 것도 고마워!


우리 집에서 가장 작고 여려 보이지만, 실은 가장 강하고 튼튼한 아이... 나의 둘째!




6코스의 백미는 "섶섬"의 빼어난 자태를 감상하는 것!


6코스 완주 스탬프의 상징은 '섶섬'인데, 직접 걸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로 6코스를 걷는 내내 '섶섬'을 보면서 걷게 되기 때문이다.


'보목포구'와 가까워질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섶섬은 왼편 얼굴을 보여주다가, '구두미포구'를 지나면서는 뒤를 돌아볼 때마다 섶섬의 오른쪽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섶섬을 바라보며 걷는 길, 바다 위에 떠 있는 돌들과 부서지는 하얀 파도마저 그림이 되는 곳!


'구두미포구'를 지나면서는 멀리 '문섬'과 '새섬', 그리고 '범섬'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계속 바라보며 걷던 '섶섬'이 그리워져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


섶섬 : 용이 되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구렁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는 숲섬. 서귀포 해양 도립 공원에 속한 아름다운 섬 중에 하나이다.


구두미포구에서는 멀리 새로운 섬들이 보이지만, 나는 자꾸 뒤돌아보며 '섶섬'과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 했다.




서귀포의 숨겨진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길


올레 6코스를 걸으며 서귀포의 숨은 비경을 마주할 때마다 몇 번을 탄식했는지 모른다. 서귀포의 이름난 명소 못지 않게, 가는 걸음마다 숨이 턱 막힐 만큼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한라산과 서귀포 앞바다와 구름과 하늘과 나무와 돌을 품은 길은,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감탄하며 걸을 뿐, 눈에 한가득 담으며 걸을 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걷기로 마음 먹은 내 자신, 칭찬해!


서귀포 앞바다와 한라산의 콜라보레이션은, 두말 하면 잔소리!
제주시에 있는 도두동 무지개 해안도로만큼, 깜찍하고 예뻤던 무지개 길 :)
서귀포 칼호텔 앞 바당길 / 소정방 폭포 내려가던 길 (모두 절경♡)
더워 하던 아이들에게 시원한 물줄기를 선물해 준, 소정방 폭포! 작은 무지개도 봤어요^^




배고픔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던 가족애(?)


쇠소깍에서 테우를 타고 나와 걷기 시작할 때가 11시쯤이었다. 식당이 제법 보이던 포구 근처를 지날 때가 1시쯤이었는데, 아이들이 별로 배고프지 않다고 해서 조금 더 걷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자며 막상 식당을 검색하자 근처에 식당이 전혀 없었다. 어쩌다 찾아낸 조금 먼 식당들은 죄다 브레이크 타임 직전이라 가기도 애매했다.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 배고픔으로 화가 잔뜩 난 나, 세 여자를 어르고 달래느라 지친 남편까지! 환장의 콜라보였다. 어찌저찌 중간 스탬프를 찍는 '소라의 성'까지 가기는 했다.


점심을 먹고 왔더라면 시민을 위한 도서관으로 운영되는 '소라의 성'에 들어가 시원한 바람도 쐬고, 잠시나마 책을 읽는 여유도 부렸을텐데, 우리 가족은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서 걷자! 아빠가 맛있는 짜장면 사줄게~"


배고프고 지친 상태라, 우리 가족은 모두 날이 바짝 선 상태였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공격적인 말을 하고 있었고, 나 또한 남편에게 거침없는 공격 멘트가 나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배고픔은 가족 불화의 큰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매우 덥고 힘들고 배고프던 우리 가족... 서로 뾰족뾰족한 상태!




정방폭포?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우리가 점심을 먹으려고 찜해 둔 중국집을 코앞에 두고, 정방폭포가 떡하니 등장했다. 올레길 루트만 따라 간다면 정방폭포를 보러 내려가지 않아도 되고, 그냥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바다 위로 떨어지는 정방폭포를 아이들에게 한번쯤은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났다. 남편과 나는 연애하던 시절에 이미 정방폭포를 구경한 경험이 있었고, 아이들은 아직이었다.


"얘들아, 바다 위로 떨어지는 폭포 보고 싶지 않아? 이거 제주에만 있는 거야!"


남편의 눈물겨운 약팔이(?)가 시작되었다. 사실 너무 배고프고 힘든 상태라, 나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상태였다. 아이들은 더더욱 표정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싫어!! 폭포 같은 거 안 보고 싶어!! 아까 소정방폭포 봤잖아~"


"빨리 가서 짜장면 먹을래!!!!"


아이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 남편이 누구인가, 아이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지략가이다.


"그럼 너희는 여기 있어~ 엄마 아빠만 다녀올게!"


처음 올레길을 걷기로 했을 때도 그랬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이상하게 '엄마랑 아빠가 자기들 빼놓고 무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가는 수밖에.


정방폭포를 보기 위해 무수히 많은 계단을 내려가며 똑똑한 4학년 큰 딸이 불현듯 외쳤다.


"이따가 이 많은 계단을 다시 올라와야 되는 거잖아? 나 안 내려갈래! 폭포 안 볼 거야! 악~"


큰 딸은 다시 한 번 포효했지만, 그걸 받아주는 가족 구성원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정방폭포를 보기로 했으니, 보고 와야 끝나는 일이었다.


막상 거대한 규모의 정방폭포와 마주 하니, 시원하게 떨어지며 사방으로 튀는 물줄기를 맞으려고 더 가까이 가려고 용쓰는 건 우리 아이들이었다.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밟고 가야만 가까이서 폭포를 볼 수 있었는데, 균형을 잘 못 잡는 나에겐 또 발을 다칠까봐 무서워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싫다고 해놓고 막상 정방폭포를 온전히 잘 즐긴 건 아이들! 이러니 남편과 내가 어디든 아이들을 꾸역꾸역 데려가 보는 것 같다.


일단 본인이 직접 가서 느껴 봐야, 그 곳이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법!


정방폭포, 시원한 물줄기가 콸콸!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말을 다시금 깨달았던 날


정방폭포까지 구경하고 수많은 계단을 올라오니, 모두들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조금만 걸어가니 목표했던 중국집이 보였다. 드디어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돼서 감사한 순간이었다.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까지 맹렬하게 먹으니 포만감에 금세 행복해졌다.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인상도 펴지고, 가족들에게도 사납지 않은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배고픔은 정말, 사람을 흉폭하게 만든다.


지금도 여전히 그 집 음식이 객관적으로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저 많이 걷고 오래 굶주린 상태에서 정신없이 먹은 음식이라 당연히 맛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제 서귀포 시내를 통과해 마지막 스탬프를 찍을 일만 남아 있었다. 배를 든든히 채웠으니 힘을 내서 완주해 보기로 했다. 중간에 이중섭 화가님의 거주지도 들르고, 미술관도 빠르게 지나쳐 갔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과 함께 '이중섭 미술관'도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뻘개진 아이들의 두 볼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얼른 완주 스탬프를 찍고, 아이들에게 시원한 음료를 사주고 싶어졌다.


둘째가 이중섭 화가님이 거주하던 방을 보더니, 엄청 좁다며 놀라워 했다! 황소 그림 그린 분이란 것도 알고 있더라는^^




걷기 초반에는 사진이 엄청 많은데, 후반에는 사진이 거의 없다?


4코스, 9코스에 이어 세 번째로 도전한 6코스 올레길이었다. 사진첩을 들여다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낀 건 한 가지였다. 코스 초반에는 사진이 넘치고, 완주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ㅋㅋㅋ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소진되기 때문이리라. 6코스가 올레길 중에 가장 짧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이들과 걷는 것은 어려웠다. 하루종일 해가 쨍쨍 내리쬐서 얼굴 가득 열감이 느껴져 더 힘들었다.


서귀포 올레 시장 근처 카페에 들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무디를 하나씩 사주었다. 시원하다면서 후릅후릅- 어찌나 맛있게 잘 먹던지! 아이들은 제대로 당 충전 된다며 밝은 미소를 되찾아 갔다.


서귀포 시내까지 나온 김에,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 샵에도 들렀다. 아이들에게 올레 6코스 완주 기념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것. 아이들은 신중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골랐다.


둘째가 고른 것은 '제주도 푸른 밤' 음악 소리가 흐르는 오르골이었다. 작고 귀여운 본인과 꼭 닮은 물건^^


올레 여행자 센터 앞에 도착해 6코스 완주 스탬프를 찍고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둘째가 엄마랑 같이 앉고 싶다며 내 옆자리를 택했다.


같이 걸을 땐 든든한 아빠를, 같이 앉을 땐 포근한 엄마를 선택하는 녀석

올레 6코스 완주도 성.공.적!




버스 옆자리에 앉은 둘째가 저만치에 앉은 언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오르골 너무 갖고 싶었는데! 사줘서 고마워~"


배시시 웃는 그녀의 환한 미소에 마음이 녹아 내렸다.


"엄마, 내가 고른 올레길 어땠어? 나는 6코스 너무 좋았는데.. 나 잘 골랐지?"


엄마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둘째를 보니, 항상 칭찬에 목말라 하던 어린 내가 보이는 듯 했다.


"우리 딸이 고른 길인데 당연하지! 엄마는 너랑 같이 걸어서 정말 좋았어~"


엄마의 반응을 궁금해 하던 아이는, 이내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엄마, 오르골 소리 너무 좋으니까 작게 한 번 들어봐~"


아이는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가 나오게, 오르골 태엽을 천천히 감아 주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가사는 또 언제 외운 건지, 제주도 푸른 밤을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둘째... 점점 오르골 소리가 늘어지는가 싶더니, 흥얼거림이 잦아 들다가, 마침내 아이는 내 팔에 머리를 톡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


세상 무해하고 다정하며 사랑스러운 나의 둘째, 잘 자라 우리 아가! 엄마는 6코스를 걷는 내내, 너를 생각하며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단다.

섶섬, 그리고 둘째와 내내 함께 했던 6코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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