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코스, 군산 오름에 오르고 싶었던 큰 딸이 고른 길
엄마, 다음 올레길은 내가 골라도 돼? 나... 오름 오르고 싶은데!
오늘도 초반에는 신나게 뛰다가, 후반에는 숨을 몰아쉬며 기다시피 걸을 것이 빤히 예상되는구나!
박수기정 : 샘물을 뜻하는 '박수'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말로 '바가지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뜻. 대평포구에 서면 약 100m 높이의 수직 절벽인 박수기정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웅장함을 절로 느낄 수 있다.
나의 아기 새들아, 엄마는 영원히 너희들의 따뜻한 둥지로 남을 거야!
"엄마, 여길 어떻게 올라가라구~ 나 못 가! 안 갈래!"
"딸~ 니가 오름 오르고 싶다고 해서 여기 9코스로 온 거잖아~"
"이렇게 높은 데로 올라가야 될 줄은 몰랐지!"
"오름이 왜 오름인 줄 몰랐구나? 열심히 올라야 되니까 오름이라고 이름 붙여둔 거야!"
실제로 그랬다. 오름은 '오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이니까!
오름 : 제주 전역에 분포한 단성 화산을 일컫는데, 제주에서 통용되는 순우리말이다. 쉽게 생각해서 제주도에 있는 200m 이하의 봉우리나 산을 '오름'이라고 간주하면 대체로 맞다. 우리말의 동사인 '오르다'에서 파생된 낱말로 추정된다. <나무위키 백과사전 中>
억지로 오름을 오르고 있는 딸 아이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자니, 마치 한 마리의 거북이 같았다. 뒤로 멘 자신의 가방을 등껍질 삼아, 땅에 손이 닿을 듯 네 발로 기다시피 엉금엉금 올라오던 그녀...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 먼저 도착한 나는 아이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거북이처럼 기어 오던 그녀가 갑자기 등을 곧게 펴고 일어나더니, 뒤로 휙 도는 게 아닌가?
"어디 가! 그냥 내려 가려고?"
내가 놀라서 소리 치자, 아이는 등을 보인 채로 대답해 주었다.
"엄마, 나 그냥 뒤로 걸어서 올라 갈게! 차라리 그게 덜 힘들 것 같아!"
아이는 진짜 뒤로 걷기 시작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우뚝 솟은 산방산을 내려다 보며, 뒤쪽으로는 흘끗 눈길만 돌려 넘어질 만한 돌부리가 있는지도 살펴 가며, 아이는 천천히 뒤로 걸어 올라왔다.
"엄마! 뒤로 걸으니까 오르막길이 그렇게 안 힘드네? 엄마도 이따 오르막길 나오면 해봐!"
오르막을 다 올라온 아이가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신박한 방법을 아이에게 전수 받게 되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게 너무 힘든가요? 그럼 뒤로 돌아요! 마치 내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아래로 두고, 걸음만 뒤로 옮기는 거예요! 어때요, 오르막길 오르기 참 쉽죠잉?
군산 오름 중턱으로 들어서자 나무들이 무성한 숲길이 펼쳐졌다. 덕분에 아이들은 땡볕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그늘이 주는 시원함을 만끽하며 무난하게 오름을 오를 수 있었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오르막 경사가 아니었다. 머리 위로 뜨겁게 내리쬐는 뙤약볕이었다. 막상 오르막길이 아무리 가팔라도 나무 그늘만 있으면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잘 올라가는 아이들이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그 숲은 강렬한 햇빛을 막아주는 소중한 그늘이 되어 주니! 올레길을 걷다 보면 나무와 숲에게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군산 오름을 오르는 어느 길목에서는 양 옆으로 벤치도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쉴 곳을 찾은 우리 가족은 그 곳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아무 생각없이 멍 때리며 쉬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둘째 아이가 파란색 올레 표식인 '간세'에 쓰여진 글씨를 발견하고는 신기한 듯 외쳤다.
"엄마! 여기에 페트병 뚜껑으로 만들어진 제주올레 쉼터라고 써 있어! 우와, 이 벤치가 페트병 뚜껑이었다고?"
그냥 버려지는 자원이었을 페트병 뚜껑을 재활용해서 만든 벤치라니! 누군가에게는 그저 쓸모 없어진 페트병 뚜껑이었을 텐데,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쓸모 있는 귀한 쉼터가 되어주는 게 신기하고 감사했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자원 순환의 중요성과 쓰레기로 인한 환경 문제를 주제 삼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 위에서 아이들은 자연이 주는 가르침을 온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아이들은 건전지 광고 속에 등장하는 '에너자이저' 같았다. 가파른 오름을 오르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거릴 때는 언제고, 운동 기구가 있는 공간을 발견하자 놀이터에 온 듯한 표정으로 또 뛰어 다녔다.
"아빠, 이 철봉은 왜 이렇게 낮아?"
"이건 매달리는 철봉이 아니고, 팔굽혀 펴기 하라고 만들어둔 것 같은데?"
"팔굽혀 펴기는 어떻게 하는 거야?"
"아빠가 시범 보여 줄게! 잘 봐~"
아이들은 아빠 '교관'의 팔굽혀 펴기 시범을 보더니, 이내 팔굽혀 펴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마치 건전지 광고 속에 등장하는 '에너자이저'들 마냥, 단숨에 열을 올리며 팔굽혀 펴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
저기요... 올레길 걷기는 체력전인데, 여기서 왜 체력을 낭비하는 겁니까 여러분? 누가 보면 아빠가 호랑이 교관처럼 아이들 군기 잡으려고 팔굽혀 펴기라도 시키는 줄 알았을 것이다.
군산 오름 정상까지 오르는 찐 마지막 구간인 '천국의 계단'을 앞에 두고, 우리 집 '에너자이저'들은 팔굽혀 펴기를 하며 아끼고 아껴도 모자랄 체력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잊고 있던 진실이 하나 있었으니, 우리 집 실제 호랑이 교관은 바로 엄마인 '나'라는 거!
"얘들아, 이 계단만 오르면 군산 오름 정상이야! 팔에는 힘 빠졌어도 아직 다리에는 힘 남았지? 높이 올려다 보면 너무 까마득하니까 당장 눈 앞에 있는 계단만 보고 걷는다, 실시!"
엄마 '교관'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천국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군산 오름으로 오르는 이 끝없는 계단을 올라야지만 중간 지점 스탬프를 찍을 수 있었다.
제군들! 올레 9코스, 절반의 성공을 알리는 지점을 향해 멈추지 말고 진군하라!
엄마, 9코스 중간 스탬프는 특이하게 말 모양 벤치에 있어~
드디어 군산 오름 정상부에 올랐다. 다른 올레길의 중간 스탬프 지점과는 달리, 등이 제법 긴 말 모양 벤치가 놓여 있었다. 아이들과 올레 패스포트에 중간 스탬프를 찍고, 그 벤치에 앉아 천천히 풍경을 감상했다.
미세먼지가 많아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조금 희미하긴 했지만, 고즈넉한 시골 풍경과 어우러진 서귀포 바다를 감상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심지어 뒤로 시선을 돌리면 웅장한 한라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힘들게 오름을 올라 온 보람이 있었다. 압도적인 풍광을 선물해 준 군산 오름에게, 그리고 그 군산 오름이 있는 올레 9코스를 선택해 준 큰 딸에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9코스 올레길에서 큰 아이의 목표는 '군산 오름' 오르기였다. 목표를 달성한 큰 아이는 남은 올레길 위에서 다른 재미를 찾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재미를 추구하는 건 작은 아이도 못지 않게 열심이었다.
다음은 아이들이 올레길을 조금이나마 더 쉽게, 지치지 않고 걸으려 애썼던 모습들이다.
1. 올레길 위에서 '정자' 찾아 쉬기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정자를 자주 만난다는 걸 지난 올레길에서 깨달은 아이들! 아직 한참 남은 올레길 도착 지점을 목표로 삼으면 까마득한 기분이 든다는 것도 알고 있던 아이들!
아이들은 당장 다음번에 만나게 될 정자를 목표 삼아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빠 엄마보다 빠르게 정자에 도착해야만 더 오래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 아빠보다 앞서서 부지런히 걸어 나갔다. 저 멀리 정자 비스무리한 형체가 보이면 무조건 뛰었고, 엄마 아빠가 정자에 도착할 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는 했다.
아이들은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작은 목표를 세울 줄 알게 되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작은 목표들을 하나씩 이루다 보면 결국 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아이들이었다.
2. 풀숲에 숨겨진 고사리 찾아서 꺾기
우리 부부가 한창 고사리 꺾기에 빠져 살았을 때 걸었던 길이라 그런지, 고사리가 여기저기 많이 보였다. 눈에 자꾸 보이는 실한 고사리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톡'하고 꺾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관심을 보였다.
"아빠, 이게 고사리야?"
"엄마, 고사리 맞는지 봐줘~ 꺾어도 돼?"
아이들이 고사리를 알아보는 확률은 실시간으로 높아졌다. 자꾸만 길 양 옆의 풀숲을 들여다 보느라 걷는 속도는 느려졌지만, 아이들은 고사리 찾기의 재미에 빠져 길만 걸어야 하는 지루함을 떨쳐 내고는 했다.
3. 안덕계곡 데크길 오르락내리락 하기
안덕 계곡 데크길에 집입하기 전까지는 땡볕이 정수리 위로 내리 꽂히는 구간이었다. 한참 뜨거운 길을 걷다가 안덕 계곡 데크길에 들어서자 일순간 온몸의 온도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덕계곡 : 제주의 계곡 중에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계곡. 병풍처럼 둘러쳐진 기암 절벽과 평평한 암반 바닥에서 유유히 흐르는 맑은 물이 멋스런 운치를 자아냄. 3백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난대림 원시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음. 추사 김정희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았던 곳.
<VISIT JEJU 관광지 안내 中>
역시나 아이들은 그늘 아래에선 날아 다닌다. 더군다나 계곡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원한 바람도 불어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저절로 식혀 주었다.
데크 길도 매우 잘 닦여져 있어서, 아이들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계단을 걷는 것조차 즐거워 하며 길을 빠르게 걸어 나갔다.
4. 한적한 길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 추기
정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싶은 길이 이어질 때는, 아이들이 음악을 요청해 왔다.
"엄마, 노래 좀 틀어 주세요! Drop the beat~"
아이들은 요즘 초통령 '아이브'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바닥으로 떨어진 텐션을 음악의 힘으로 끌어 올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상한 오징어 춤을 추며 길을 걷는 아이들!
덕분에 걷느라 지쳐 미소를 잠시 잃었던 우리 부부도 '하하하~' 크게 웃고 만다. 우리 집 엔돌핀, 비타민들! 다만 한창 춤을 추고 나면 걸음 속도가 훨씬 느려진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5. 엄마의 사랑을 확인 받으며 힘내서 걷기
큰 아이의 끝말잇기 사랑은 계속 되었다. 아니, 엄마에 대한 사랑은 계속 되었다.
큰 아이가 올레길을 걸으며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엄마인 나와 단둘이 걷는 시간이었다. 가장 걸음이 느린 탓에 맨 뒤에 가고 있는 엄마를, 굳이굳이 기다렸다가 발 맞춰 걷던 아이.
덕분에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빠와 작은 아이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으면, 둘이서만 끝말잇기를 시작하며 도란도란 걸었다. 그러다 큰 아이는 뜬금없이 나를 향해 묻고는 했다.
"엄마는 나 사랑해?"
"당연히 사랑하지! 알면서 왜 물어봐?"
"아는데도 엄마 입으로 또 듣고 싶어서~"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여전히 엄마의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마치 서른 일곱 살 먹은 애 둘 엄마가 되었어도 여전히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나처럼.
"엄마가 우리 딸 엄청 사랑해!"
내가 항상 엄마에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나의 딸에게도 아낌없이 해 주었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먹으며 세상을 걸어 나갈 힘을 또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엄마도 사랑 표현을 적게 하시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삼남매 중 끼인 둘째였던 나는 엄마 사랑이 늘 고팠다. 엄마의 손을 독차지하며 걸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
그 때는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사랑은, 사실 차고 넘칠만큼 크고도 깊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 엄마의 사랑을 야금야금 먹고 자란 내가 이렇게 나만의 길을 뚜벅뚜벅 잘 걸어 나가고 있는 게 그 증거일 테다.
남은 올레길은 나의 손 모양과 꼭 닮은 큰 딸의 손을 잡고 걸으며, 나의 손 모양과 꼭 닮은 나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힘을 내 걸었다.
올레길 안전 수칙 하나, 하절기 6시 동절기 5시 이후 걷기를 자제해 주세요.
올레길 9코스를 걷던 이 때는 4월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동절기라 5시 이후에는 걷기를 멈추는 게 맞았다. 그런데 5시가 넘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착 지점에 가닿지 못한 상태였다.
제주는 해가 지면 천지사방이 어두워지는 곳이다. 그 어두움과 적막의 깊이를 알기에 나는 더더욱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의 걸음은 자꾸만 느려질 뿐이었다.
그러다 9코스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나누리 파크'에 다다랐다. 멀리 보이는 산방산 뒤로 붉은 해가 천천히 넘어 가는 중이었고, 노란 유채꽃이 주황 노을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주 잠깐, 고민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무시하고, 아이들 걸음을 재촉해서 도착 지점까지 부지런히 걸을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노을지는 산방산과 해질녘 유채꽃밭을 여유지게 바라볼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두고두고 잘한 선택이 되었다. 내 인생에 산방산을 배경으로 한 노을과 유채꽃을 그렇게 넋놓고 바라볼 수 있는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그 날의 노을과 유채꽃과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는 그 날만 볼 수 있는,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순간이었다.
엄마, 9코스는 하루만에 다 걸었어요!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앞, 9코스 도착 지점에 간신히 도착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가까운 식당으로 먼저 갈까 하다가, 그래도 해가 떠 있을 때 완주 성공 기념 사진을 남기기로 했다.
올레 패스포트에 완주 스탬프를 찍고, 가까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삽시간에 바깥 풍경이 캄캄해졌다. 하마터면 아이들과 어둠 속을 헤맬 뻔 했다고 생각하자, 간담이 서늘했다.
다음 올레길은 더욱 더 아침 일찍부터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허겁지겁 백반 정식을 먹고 난 뒤, 어두워진 밤을 헤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다음 올레길은 내가 정할래! (by.둘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