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리뽀 Dec 06. 2024

서우봉까지만 걷자꾸나!

19코스 첫째 날,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는 길


여보세요? 여기는 '제주과학문화협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신청하셨던 비양도 투어는 희망자가 많아서 아쉽게도 선정이 안 되셨구요.. 대신, 이번주 일요일에 하는 서우봉 투어에는 참여 가능하신데 혹시 오실 수 있으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제주 지질 투어 프로그램'에 신청했던 게 생각났다. 주어진 4개의 코스 중에 딱 1개만 신청 가능하대서 비양도를 골랐는데 떨어진 모양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서우봉 투어라도 참여할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어서 냉큼 가겠다고 답했다. 서우봉은 마침 올레 19코스의 일부 구간이기에, 겸사겸사 올레길도 걸으면 될 것 같아서였다.


다만, 이번 올레길은 다른 일정들 때문에 이틀에 나눠서 걷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19코스 시작점부터 함덕 해수욕장까지만 걷고, 일요일에 서우봉 투어를 한 뒤 남은 구간을 다 걷는 것으로! 

   

총 19.4km 중에 6.3km만 걸으면 되는 첫날^^



얘들아, 오늘은 6km 정도만 걸으면 돼! 엄청 쉽겠지?


점심을 든든히 먹고 19코스가 시작되는 '조천 만세 동산'으로 갔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터무니 없이 짧은, 고작 6km만 걸으면 된다는 기쁜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지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차차, 오전에 가을 운동회에 참여하느라 이미 체력이 많이 소진된 너희 상태를 엄마가 잠시 잊었구나...^^;


오늘 올레길 19코스 걷기의 난관은 아마도, 고갈된 아이들의 체력과 따갑게 내리쬐는 가을 땡볕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팍팍 들었다.


그래도 힘내서 걸어보자! 올레 안내소 직원분께서 찍어주신 가족 사진^^
19코스 올레길 걷기 시작!
하늘이 높고 푸르러 가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던^^



와! 하얀 메밀꽃이 여기저기 가득 피어 있네!


제주가 전국 최대 메밀 생산지라는 걸, 나는 제주에 살러 온 올해 처음 알게 되었다. 메밀 하면 '강원도 봉평'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에, 조금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제주에서는 일년에 두 번, 봄과 가을마다 중산간 지역을 하얗게 수놓는 메밀꽃을 볼 수 있다. 지난 봄에 남편과 와흘 메밀 축제에 가서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을 잔뜩 본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봄, 와흘 메밀 축제에 가서 본 메밀꽃!


이번 가을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메밀 축제에 가볼 생각이었는데, 올레길을 걸으며 계속 메밀꽃을 볼 수 있다니! 굳이 메밀 축제까지 갈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하얀 메밀꽃을 실컷 보며 걷던 길
메밀 꽃밭을 지나, 등대가 있는 바다로 나아갑니다.
이 좋은 가을날, 아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던 :)



어머, 이번에는 코스모스잖아! 바닷가에 핀 코스모스라니 너무 예쁘다!


관곶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뒤로는 푸르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까만 돌담 앞으로는 색색의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흔들리며 가득 피어 있었다.


참 이상하지... 해마다 가을이면 봐왔던 흔하디 흔한 코스모스인데, 제주에서 만난 코스모스가 유독 더 예뻐 보였다. 배경이 되어주는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서인지 꽃 색깔도 더 선명히 느껴졌다.


바다 앞에 핀 코스모스라니, 너무 예쁘잖아♡



"엄마, 얼마 전에 학교에서 코스모스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려 봤거든! 코스모스 꽃잎은 보통 8장으로 되어 있고 끝 모양이 톱니처럼 생겼어~"


"오, 정말이네? 엄마는 코스모스를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 코스모스 너무 예쁘다~"


"엄마,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코스모스가 예뻐 내가 예뻐?"


"당연히 우리 딸이 더 예쁘지!"


"그럼 꽃 구경 그만 하고 가자! 나는 꽃 구경 재미 없어~"


"나도! 코스모스 다 봤어~ 올레길이나 얼른 걷자!"


아! 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작년보다 올해 더 코스모스를 예쁘다고 생각한 이유! 그건 바로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였다... (또르르ㅠㅠ)


꽃보다 어여쁜 너희들은, 아직 꽃이 예쁘다는 걸 모를 때란다^^



신흥리 백사장? 여기 함덕 해수욕장 아니야?


함덕 해수욕장의 명성에 가려져 덜 유명하긴 하지만, 도민들에겐 한적하고 예쁜 해수욕장으로 사랑 받고 있는 신흥리 백사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오늘의 목적지인 함덕 해수욕장에 다 온 줄 알고 좋아 했다가, 올레 표식에 쓰여진 '신흥리 백사장' 글씨를 보더니 적잖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함덕 해수욕장인 줄 알았는데 신흥리 백사장이네? 아..."


"엄마, 함덕 해수욕장은 어디쯤이야?"


"저기 초록색 산등성이 보이지? 저기가 서우봉인데, 그 앞이 바로 함덕 해수욕장이야!"


"으헹... 저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네!"


아이들은 땅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평소 올레길을 걷던 패턴이라면, 아직 극초반에 불과한데도 아이들은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오전에 가을 운동회에 가서 신나게 뛰었으니 힘만도 했다.


다 온 거 아니었어? 좌절 중인 첫째...
아, 더는 못 걷겠어! 그대로 드러누워 버린 둘째...
그렇게 한참을 신흥리 바다에서 쉬었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서우봉까지 언제 가지?



엄마가 함덕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망고 쉐이크 사줄게!


아이들을 다시 걷게 하려면 방법이 필요했다. 몇 년 전에 가족이 다 함께 제주로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겨우 다섯 살이던 둘째가 너무 맛있었다며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게 하나 떠올랐다. 바로, 망고 쉐이크!


"딸내미들아, 함덕 해수욕장에 망고 쉐이크 집이 있거든! 도착하면 엄마가 그거 사줄게~"


"어? 내가 다섯 살 때 먹고 엄청 맛있어 했던 그 망고 쉐이크야?"


"응! 아마 그 때 먹었던 맛이랑 똑같을 거야~ 어때?"


"와, 좋아! 망고 쉐이크 또 먹고 싶었는데~ 얼른 가자 엄마!"


다행히 미끼(?)를 잘 던진 듯 했다. 둘째가 미끼를 덥썩 물고 앞서 걷기 시작하자, 첫째도 하는 수 없이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부디 아이들이 망고 쉐이크를 먹기 위해 끝까지 잘 걸어 주기를...!


신흥리 바다, 고즈넉하니 아름다웠던 :)
알록달록한 신흥리 마을길로 들어 섭니다.
신흥리 사람들에게 귀한 장소였을 '신흥물'도 잠시 구경하고!
아주 잠깐, 첫째가 길가에 주저 앉아 버리는 위기도 있었지만(?)



와! 드디어 함덕 해수욕장 도착이다!


두 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한 함덕 해수욕장이었다. 'Beautiful Hamdeok' 이라고 쓰인 담벼락 문구에 걸맞게 아름다운 함덕 바다가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Beautiful Hamdeok, 여전히 아름다웠던 함덕 바다 :)


"우리 내일은 저기 보이는 서우봉에 갈 거야! 서우봉 투어 끝나면 남은 올레길도 마저 걷자!"


아이들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덕 바다 앞에 드러누워 버렸다. 나는 아이들 옆에 앉은 채 시시각각으로 색깔을 바꾸는 함덕 바다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름 떼가 해를 가리고 있던 터라, 함덕 바다가 지닌 투명한 빛깔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에메랄드빛 함덕 바다를 보려면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했다.


해가 잠시 모습을 감추자, 함덕 바다도 자신의 고유한 빛깔을 숨기고 있었다.


차분히 기다리고 있자니, 구름 뒤에 숨어 있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무대에 덩그라니 서 있던 함덕 바다는 햇빛이라는 조명을 받으며 단숨에 주인공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함덕 바다까지 야무지게 걸어온 우리 가족도 주인공이었다. 함덕 바다와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있어 더없이 영광이고 기뻤던 날!


오늘은 함덕 바다와 우리가 다같이 주인공^^


올해만 벌써 몇 번째 와보는 함덕 바다인지 모른다. 그런데 올 때마다 처음 마주한 것처럼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 곳이었다. 까도 까도 또 다른 매력을 숨기고 있는 양파 같은 바다랄까!


함덕 바다에 친정 엄마와 단 둘이 왔을 때도, 남편과 단 둘이 왔을 때도 좋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아이들과 걸어서 당도하게 된 오늘의 함덕 바다가 가장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친정 엄마 그리고 남편과 와봤던 함덕 바다도 좋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바라본 함덕 바다가 가장 아름다웠다..♡



엄마가 약속한 대로 망고 쉐이크 사줄게!


아이들과 '리치망고 함덕점'으로 가서 약속했던 망고 쉐이크를 사주었다. 그동안 나의 남편은 무얼 하고 있느냐? 집안의 가장이란 죄로, 남편은 혼자 쓸쓸히 버스를 타고 올레길 시작점으로 간다.


아이들이 망고 쉐이크를 먹으며 아픈 다리를 쉬고 있는 동안, 남편은 주차해 둔 차를 끌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러 온다지요! 사랑하는 남편, 매번 차 가지러 혼자 가느라 고생이 많아유...♡


달콤한 망고 쉐이크를 먹는 것으로 오늘의 여정 마무리!



내일은 올레길 19코스 완주를 목표로 하자! 오늘도 걷느라 수고했어 딸들아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