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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Dec 07. 2024

함덕 바다에서 김녕 바다까지

19코스 둘째 날,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와 함께 하는 길


어제도 갔던 함덕 해수욕장을 오늘 또 가네!


아이들 입에서 볼멘 소리가 흘러 나왔다. 집에서 한 시간이나 차를 타고 가야 하는 함덕 해수욕장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가는 것이 썩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주과학문화협회'에서 주최하는 서우봉 투어에 참여하게 돼서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올레길 걷기를 멈추었던 함덕 해수욕장이 오늘 서우봉 투어의 시작 장소였던 것이다.


오늘은 함덕 해수욕장부터 김녕 서포구까지 남은 올레 19코스를 걸을 예정!


일찍 도착한 덕분에 사람이 거의 없는 함덕 바다를 누릴 수 있었다. '서우봉'이 적힌 올레 표식을 찾아 기념 사진을 찍고, 고운 모래 해변에 앉아 아름다운 바다를 눈에 가득 담기도 했다.


뒤로 보이는 서우봉!
함덕 해수욕장에서 모래 놀이하는 아이들^^


곧 투어에 참여하는 가족들이 모두 모였고, 지질학과 생물학을 전공하신 교수님들을 따라 서우봉에 오르기 시작했다.


교수님 꽁무니만 졸졸 따라 가며 열심히 설명 듣던 아이들^^


어제도 날씨가 좋더니, 오늘도 기가 막힌 날씨였다. 서우봉에 올라 구름에 살짝 가리워진 한라산과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함덕 바다를 함께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함덕 바다와 나의 딸들♡


지질학 교수님은 서우봉과 함덕 해변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 주셨고, 생물학 교수님은 군데군데 보이는 나무와 풀에 대해 많이 알려 주셨다.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혹여나 아이들이 지루해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아이들은 가장 선두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지하게 강의를 듣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서우봉 투어에 열심히 참여 중인 아이들^^


투어의 마지막에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동굴 진지도 보러 갔다.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시킨 것도 모자라, 제주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무자비하게 노역을 시켰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도 목격할 수 있었던 서우봉!


2시간 동안 이어진 서우봉 투어는 점심 때쯤 끝이 났다. 가까운 식당에 가서 점심부터 먹고 올레길을 걸을 계획이었는데,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간식으로 받은 토스트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근처에서 따뜻한 음료만 사다가 토스트와 함께 먹기로 했다. 오늘 점심은 토스트로 때우지 뭐! (그리고 이 때의 결정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결정이었다는 걸 밝히는 바이다...)

 

서우봉을 내려와, 북촌리로 넘어가는 구름 다리 앞에서 물고기 구경 중!




북촌 마을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봄에 우연히 이 곳을 방문했고, 제주 4.3 사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마주한 애기 무덤...


이유도 모른 채 스러져 간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들도 제주의 학교에 다니는 동안 4.3 사건을 배우게 되어 더 관심있게 살펴보는 눈치였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바다 위로 섬 하나가 보였다. 이름은 '다려도'였다. 4.3 사건 당시에 화를 피하려고 무인도였던 저 섬으로 많은 주민들이 도망을 갔었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사연이 있어 먹먹해지는 '북촌리'였다.


저 멀리는 보이는 섬, 다려도!


다려도를 왼쪽으로 두고 걷다 보면 돌로 쌓아서 만든 등명대가 나온다. 등명대는 고기 잡으러 나간 배가 무사히 돌아오길 비는 등대였다고 한다.


지금은 바로 앞에 위치한 식당에서 꾸며두신 건지, 여러 색깔로 칠해진 소라 껍데기들이 사방에 깔려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스팟이 되었다.


소라 껍데기 덕분에 화려해진 등명대!


그러나 이 등명대에도 아픈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다. 등대 표지석에 4.3 사건 때의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총알이 박혔던 흔적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명대에 올라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재해와 전쟁 등의 비극적이었던 사건 현장을 체험하는 여행을 말한다.


오늘은 의도치 않았지만 서우봉에서 일제 동굴 진지를 보며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느낄 수 있었고, 북촌 마을과 너븐숭이 기념관을 둘러 보며 4.3 사건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도 들었지만, 역사를 바로 알아야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기에! 아이들과 함께 다크 투어리즘을 경험해 볼 수 있어 더욱 뜻깊은 올레 19코스였다.


예쁜 벽화로 아름답게 피어난 북촌리의 모습




19코스 후반부는 바닷길에서 점점 멀어지며 인적이 드문 숲길로 향하고 있었다. '올레길 19코스 마지막 편의점'이라 쓰여 있던 CU를 지날 때만 해도 얼마나 첩첩산중일지 감히 예상도 못했다지...


여기서 첫째가 간식거리 좀 사달라고 할 때 사줬어야 했는데...


사실, 오늘 아침에도 빵을 먹었다. 함덕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오드랑 베이커리'에 가보고 싶어서 정한 메뉴였다. 그럼 점심 때는 밥을 먹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토스트를 먹게 된 것.


빵으로 두 끼를 해결한 건 역시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올레길을 걸을 때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밥심'이라는 걸, 걷는 내내 힘들어 하다가 문득 깨달았으니까.


귤 까먹으며 걷다가 큰 사마귀를 발견한 첫째!
시부모님이 농사 지어서 보내주신 사과대추도 먹으며 힘내 봅니다!


중간 스탬프가 있는 '동복리 마을 운동장'까지는 정말 으슥진 느낌의 길이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화장실도 없기 때문에 단단히 준비를 하고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올레 표식을 따라 더 으슥한 곳으로 가는 중!
중간 스탬프는 어디쯤에 있는 거지?


한참을 걷다 보니 동복리 마을 운동장이 나타났다. 아이들은 중간 스탬프를 찍겠다며 풀로 무성하게 뒤덮인 운동장을 와다다다- 가로질러 뛰어 갔다.


동복리 마을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가면
중간 스탬프를 찍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힘들어서 사진 촬영 거부함^^;)




'벌러진 동산'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자 짧은 글귀가 적힌 파란색 표식이 보였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서 발췌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밥심이 부족했는지 부쩍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었는데, 글귀를 발견하자 보물을 찾은 것 마냥 즐거워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션을 주기로 했다.


얘들아, 글귀 발견할 때마다 큰 소리로 엄마 아빠한테 읽어 줄래?  


엄마 아빠의 특급 미션을 받아든 아이들은 신이 나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박노해 시인의 글귀를 찾아, 먼저 간 아이들^^


아이들이 큰 목소리로 읽어주는 글귀들이 숲 속 가득 메아리로 울려 퍼지며 나에게로 와닿았다.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보낸 10여 년의 세월도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듯 했다.


어쩔 때는 내가 아이들을 키운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키워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이들과 올레길을 걸을 때 그런 생각이 많이 드는데,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아이들이 먼저 찾아내서 읽어준, 내 마음을 크게 울린 주옥 같은 글귀들을 몇 개 소개해 본다.


그냥 걸어라. 첫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그냥 걸어라.
첫걸음마를 떼고 아장아장 걷던 너희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왔다.
나는 너희들 덕분에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볼 수 있었지 :)


좋은 동행자가 함께 하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은 법이다.
엄마의 가장 좋은 동행자인 너희와 함께 걸으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게 느껴진단다.


마음아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 아가들도 천천히 걸으려무나, 길을 잃지 않도록^^


자주, 그리고 환히 웃어요. 가끔, 그리고 깊이 울어요.
누구보다 눈물이 많은 첫째 아이야... 가끔, 그리고 깊이 울려무나 :)


너와 나, 이 만남을 위해 우리는 오랜 시간 서로를 향해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자매라는 인연으로 만난 너희들, 소중한 만남이란 걸 잊지 않기를 :)


키 큰 나무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났던 숲만큼, 쑥쑥 크려무나^^




박노해 시인의 글귀 자체도 좋았지만, 아이들이 힘찬 목소리로 읽어주니 글귀가 살아서 움직여 내 가슴 깊은 곳으로 박혀드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싱그러운 에너지와 좋은 글귀가 주는 감동 덕분에 남은 길을 걸어 나갈 힘이 생겨났다. 무성한 숲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곶자왈 지대를 걸으며 신선한 공기도 많이 마실 수 있었다.


나를 성장시켜 주는 가장 고귀한 존재, 나의 아이들과 함께 :)
핑크빛으로 물들어 가는 억새밭을 지나, 다시 숲으로!
곶자왈에서 숲의 기운을 듬뿍 받고 나니,
가을 꽃이 피어 있는 밭담길을 만나게 됩니다.




"엄마...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들지? 분명히 어제 조금 걸어둬서 오늘은 덜 힘들 줄 알았는데!"


"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어? 하... 다리가 너무 아픈데..."


아이들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너무 힘들었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그 때는 이유를 몰랐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본인도 정말 힘들었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두 끼나 밥을 안 먹은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빵 쪼까리만 먹고서 13km나 되는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 있다.


"아, 뭐 재밌는 거 없나? 걷기만 하니까 더 힘든 것 같아!"


아이들은 지루하게 이어지는 길 위에서 심심함을 토로했다. 무언가 놀거리가 필요했던 아이들에게 남편이 길에서 주운 노란 열매를 건네며 놀이를 제안했다.


"이 노란 열매를 누가 더 멀리까지 던지는지 해볼래?"


길가에 떨어져 있던 노란 열매... (아직도 정체를 모르겠는 녀석!)


우리 남편은 '찐' 천재였다!!!!


아이들은 아빠가 제안한 '노란 열매 멀리 던지기' 놀이에 단숨에 빠져 들었다. 길에 가득 떨어져 있던 노란 열매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은 개미 한 마리 다니지 않는 텅 빈 길 위로 열매를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자기 열매가 굴러간 곳까지 뛰어 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아이들은 다시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노란 열매 멀리 굴리기 시합 중 :)
남편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 스승이 되어 준다.
길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다가 하트 모양을 만들어주는 센스까지♡




아이들이 노란 열매 장난감에도 흥미를 잃을 때쯤, 도착 지점인 김녕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함덕 바다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김녕 바다에 이르는 길고 긴 여정의 끝이었다.


신나게 19코스 도착 스탬프를 찍고 있는 아이들 :)


저기... 실례지만 아이들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아이들과 도착 스탬프를 찍으며 완주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나신 두 명의 여자분이 말을 걸어 오셨다. 명함을 한 장 내밀어 보이시면서.


"어? 카름 초이스? 제가 제주 관광 공사 블로그인 VISIT JEJU 소식 받아 보는데, 그거예요?"


"네, 맞아요! 저희가 올레길 코스와 함께 지역 카페나 맛집을 소개하려는데 사진이 필요해서요~ 아이들 뒷모습만 나오게 사진 찍어서 좀 써도 될까요?"


"네! 좋아요~ 너희는 괜찮아?"


"응, 엄마! 우리도 좋아!"


갑작스럽긴 했지만 아이들 뒷모습이나마 '제주 관광 공사' 홍보 글에 실리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아서 흔쾌히 응했다. 아이들은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사진 모델이 되어 주었다.


제주 관광 공사 직원 분에게 사진 찍히는 아이들^^
제주 일년 살이 중 겪은 신기한 일 중 하나 :)


엄마, 오늘 이모들이 찍어 간 사진은 언제 어디에 나와?


올레 19코스를 다 걸은지 한 달쯤 지난 날, VISIT JEJU 블로그 글을 보다가 낯익은 뒷통수가 보여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세상에, 진짜로 우리 집 딸들 사진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너무 기뻐서 휴대폰에 캡쳐해 둔 페이지 :)




★아이들 뒷통수 사진을 볼 수 있는 블로그 글 원문★


https://blog.naver.com/jtowelcome/223660439271




아이들과 올레길을 걷다 보니 이런 특별한 경험도 다 해보는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에게 아주 값진 경험을 선물해 주는 나의 아이들아, 정말 고마워 :)

 

올레 19코스를 걸으며 만난 글귀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귀를 아이들에게 띄워 보내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엄마의 시간 또한 너희를 사랑하는 데에 쓰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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