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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Dec 13. 2024

바람아 멈추어다오!

3-B코스, 온몸이 소금으로 절여진 길


치트키로 남겨둔 3코스, 너로 정했다!


열세 번째 올레길을 걷기로 했던 어느 일요일, 남편이 덜컥 약속 하나를 통보해 왔다. 제주에서 알게 된 옆 동네 형님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게 됐다는 것!


"올레길 걸어야 되는데 약속을 잡으면 어떡해?"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고! 오후 3시에 오기로 했으니까 그 전에 올레길 빨리 걷지 뭐~"


"애들 걸음으로 4~5시간은 걸릴 텐데, 3시까지 어떻게 돌아와?"


"흠... 치트키로 남겨둔 3코스를 걷자! 남은 올레길 중에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3코스 어때?"


이렇게 열세 번째로 걸을 올레길이 정해졌다. 3코스는 다시 두 코스로 나뉘는데, 거리도 더 짧고 바닷길로 많이 가는 3-B코스를 걷기로 했다.


사실 남편과 나는 지난 봄에 이미 3-A코스의 핵심 구간인 통오름과 독자봉에 올랐었다. 그래서 아직 못 가본 3-B코스가 더 땡겼던 것이다.


3-A코스에 속한 통오름과 독자봉에 올랐던 봄날의 추억 :)



 

아침 일찍 3-B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온평 포구에 도착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날씨였다. 게다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범상치 않았다.


"엄마! 내가 방금 옆돌기를 하는데 몸이 바람에 휘청거려서 넘어질 뻔 했어!"


"엄마, 바람이 너무 세서 모자가 자꾸 벗겨져!"


아이들 말대로 바람이 너무 강해서 올레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오늘은 아무래도 거친 바람과 사투를 벌이는 올레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예감은 슬프게도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사실 이 날 제주 지역에 강풍, 풍랑, 폭풍 해일 특보가 내려졌다는데, 안전 안내 문자는 올레길을 다 걸은 뒤에야 받았답니다! ㅠㅠ)


3코스를 걷기 시작할 때부터 강풍이 불었고,
아이들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날아갈까봐 옆에 있는 돌을 붙들었다..
남편은 쓰고 있던 모자가 자꾸 날아가서 결국 벗고 걸었지요...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갈림길 등장! 우리는 3-B코스로 갑니다 :)




분명히 해가 뜬 시각인데도 사방이 어두웠다. 잿빛 먹구름 아래서 바다는 더욱 사납게 날뛰었고, 거친 파도는 당장이라도 우리를 삼킬 듯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엄마, 10월에도 태풍 오지? 오늘 태풍 오는 거 아니야?"


"아니, 태풍 소식은 없었어! 근데 바람이랑 파도가 거의 태풍급인데?"


"내 얼굴로 계속 물이 튀는데, 이게 비인지 바닷물인지 모르겠어!"


아이들 말처럼 오늘은 태풍이 왔다고 해도 믿을 만한 날씨였다. 얼굴 가득 축축한 물기가 흩뿌려졌는데, 그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인지 바람에 실려 온 바닷물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뒤로 보이는 성산 일출봉, 무섭게 달려드는 파도!
강력한 바람에 맞서 걷다가, 지쳐서 쉬는 중!




"얘들아, 파도가 너무 세니까 바닷길로 나가지 말자!"


온평 환해장성 앞, 간세 머리가 바닷길로 향해 있었다. 앞서 걷던 아이들이 그쪽으로 가려고 하자 남편이 급히 불러 세웠다. 바닷길로 가다가는 파도에 휩쓸릴 것만 같았던 모양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높을 때는 최대한 안전한 길로 걷자! 알았지?"


평소에는 한없이 장난꾸러기 같던 남편이 가족 모두의 안전 앞에서 진지한 가장으로 변신했다. 아이들도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아빠가 엄숙하게 말하는 순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걸 아는 듯 했다.


파도가 높아서 바다로는 나가지 않았던 온평 환해장성 앞




잠시, 불안했던 바닷길을 벗어나 한적한 숲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키 큰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어 아늑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귓전을 울리던 바람 소리도 사그라져 좋았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두 명씩 짝이 지어진다. 아이들은 보통 엄마나 아빠 중 한 사람이랑 걷기를 원했고, 부모인 우리는 아이들 손을 번갈아 잡으며 걷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자매가 아주 사이가 좋아, 둘이서만 계속 짝을 이뤄 걷고 있었다. 그녀들은 사실 지독한 애증 관계인데, 오늘은 '애(愛)'가 뿜어져 나오는 날인 듯 했다.


손을 잡았다가, 어깨동무를 했다가, 둘이 걷느라 엄마 아빠는 안중에도 없던 자매들^^


이 자매들은 너 죽고 나 죽자 하며 피 터지게 싸울 때도 많은데... 재미있는 건, 외부의 누군가가 자매 중 한 사람을 건드리면 다시 죽고 못 사는 사이로 똘똘 뭉친다는 거다.


'내 동생은 나만 건드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건들면 가만 안 둬!' (자매 중 언니)


'우리 언니는 조금 얄미울 때도 있지만, 나는 언니가 제일 좋아!' (자매 중 동생)


자매가 치열하게 싸울 때 엄마인 내가 끼어들면, 나는 그 순간 공공의 적이 된다. 그녀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엄마에게서 서로를 지키려고 무진 애를 쓴다.


놀이터에서 놀 때도 그렇다. 서로 게임 룰을 지키녜 안 지키녜 하며 소리 높여 싸우다가도, 다른 아이가 와서 지적하면 갑자기 돌변해서 서로를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부모로서 자녀들이 서로 잘 지내는 모습을 보는 건 큰 기쁨인 것 같다. 아주 먼 훗날 부모가 이 세상에 없을 때도 서로를 챙기며 의좋게 살아 가기를...♡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이 좋게 지내려무나^^




바람과의 사투 외에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길이 침수되어 있었던 것! 길이 뎅강 잘린 것처럼 물에 다 잠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길 옆의 수풀을 헤치며 진창을 밟아야 했다.


하지만 처음 침수된 길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전혀 몰랐지. 그게 3-B코스를 걸으며 만난 가장 작은 침수 지대였다는 것을, 침수 사건의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정도로 길이 침수된 건 침수도 아니었다...




고즈넉한 숲길을 벗어나자 다시 쌩쌩 바람 부는 바닷길이 나왔다. 아까 보았던 온평 환해장성에 이어 신산 환해장성이 높고 길게 이어지는 길이었다.


환해장성 : 제주도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 전역과 우도에 쌓은 고려 시대의 장성이다. 제주 전역 14곳에 성벽이 남아 있으며, 주로 해적에 대한 방어용이라고 전해진다.


신산 환해장성 앞에서, 여전히 높게 부서지고 있던 파도!
신산 환해장성을 방패 삼아 걷는 길
파도가 너무 높아서 성 위로도 넘어올 것 같았던!
아이들은 걸음을 멈출 때마다 바람에 날아갈까봐 무언가를 붙들고 있었다.
엄마, 이거 놓으면 진짜 날아갈 것 같아요!!


"둘째야, 왜 그러고 있어?"


"엄마, 장난이 아니고... 이거 놓고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이 날아갈 것 같아!"


"그럼 차라리 환해장성 담벼락에 바짝 붙어 걷는 게 어때?"


"오, 엄마! 좋은 생각이다! 나도 해볼래~"


나의 제안에 솔깃해진 아이들은 환해장성 담벼락에 딱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 올레길을 걸을 때도 돌길을 더 좋아했던 아이들이라 신나게 성곽 길을 따라 걷는 모습이었다.


환해장성에 몸을 숨기고, 바람을 피해 걷는 중 :)
아쉽게도 금방 성곽길이 끊겨 버렸어요...
심심하다면서 냅다 춤을 추기 시작한 아이들!


3-B코스는 솔직히 우리 아이들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스팔트로 된 해안 도로를 걷는  대부분이었는데, 돌길과 숲길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영 심심한 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길을 걷다 말고 냅다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움을 찾으려고 용을 썼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성난 파도였다.


"으악, 엄마! 바람이 너무 세서 숨이 안 쉬어져!"


"우와~ 파도 진짜 높은데, 여기까지 넘어오면 어떡해?"


걱정을 하면서도 틈틈이 파도 구경을 하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조차 바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해 했다.


온몸으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중!
왜냐면 파도 구경을 하는 게 재밌거든요...
파도 구경에 빠진 둘째 모습 :)


"이렇게 바람 센 날에 걸으니까 어때? 좀 힘들지?"


"조금 힘들긴 한데, 시원하기도 하고 파도 구경하는 게 재밌어서 좋아~"


"근데 엄마, 입술에서 자꾸 짭짤한 맛이 나!"


"그러게... 불어오는 바람에 소금기가 가득한가 보다!"


"엄마, 당 충전하려고 사탕을 먹는데... 사탕도 짠맛이 가득해!"


아이들은 걷다 지칠 때마다 사탕을 꺼내 먹었는데 표정이 이상했다. 아이들이 꺼내든 사탕에 금세 소금기가 배여 짠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얘들아, 오늘의 올레길은 그야말로 단짠단짠한 맛이구나!


부는 바람에 소금기가 잔뜩 담겨 있던!
첫째가 다리 아파 했지만 바람을 피할 곳이 없어 쉬지를 못했답니다..ㅠㅠ




중간 스탬프가 있는 '신산리 마을 카페'에 도착했다. 화장실도 쓰고 잠시라도 바람을 피할까 싶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랬나?


우여곡절 끝에 중간 스탬프 지점 도착!


"엄마, 다리 아픈데 카페 같은 데 들어가서 쉬면 안돼?"


첫째에 이어 둘째도 휴식을 요청해 왔다. 길에서 몇 개의 정자를 만났지만 바람이 너무 불어와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계속 걷느라 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실내에 들어가서 쉬어야 되는데 근처에는 카페가 안 보이네.."


"히잉... 아까 카페 많이 보였잖아! 거기 가고 싶었는데!"


둘째 말대로 카페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조금 전에 지나쳐 왔다. 내가 남편에게 슬쩍 카페에 가자고 눈치를 줬는데 남편이 들은 체도 하지 않던 게 떠올랐다.


"아! 엄마... 따뜻한 데 가서 쉬고 싶어!"


"조금만 더 걸으면 다음 카페가 보일 거야! 너희 아빠 때문에... 아까 쉬었으면 좋았을 걸..."


둘째를 어르고 달래며 걷는 내내 앞서가는 남편의 뒷통수를 힘껏 노려 보았다. 하지만 원망을 쏟아내야 할 대상은 사실 남편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바람아, 이제 그만 멈추어다오!





우리가 바람을 피해 쉴 만한 카페는 '신풍 신천 바다 목장' 끝에 있었다. 바다 목장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이제 여기만 지나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신풍 신천 바다 목장에 도착!


광활한 초지가 드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시야가 사방으로 트이자 바람이 더 거칠게 불어 왔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도 목장의 말이 된 것 마냥 신나게 뛰기 시작했다.


말처럼 드넓은 초원을 뛰는 아이들!
사실 바다 쪽으로 올레길이 있었지만 파도가 무서워 못 내려 갔습니다!
바람 부는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네들!
대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던 순간!


"엄마! 저기 좀 봐! 여기는 말 대신 소가 엄청 많아!"


이렇게 바닷바람이 강한 날에도 소들은 한가로이 풀밭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제주에서 흔하게 보던 말 대신 소들을 구경하느라 신나 했다.


바다 목장에서 본 소떼!




목장을 따라 걷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그토록 원했던 카페가 있었다. 거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얼른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은 너무나 아늑하고 따스했다. 


창밖으로 미친듯이 흔들리는 나무와 높게 일렁이는 파도가 보였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한 곳에 있었다는 믿기지 않았다.


길에서는 나란히 걷느라 몰랐는데 카페에서 마주보고 앉은 아이들 상태도 가관이었다. 아이들 머리는 바람에 휘날려 산발이었고, 아이들 옷에는 의문의 하얀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 너희들 옷에 묻은 이 하얀 가루는 뭐지? 사탕인가?"


"이거? (손으로 찍어서 혀로 맛보더니) 으~ 짜다! 소금이네, 엄마!"


그랬다. 찬찬히 살펴보니 남편과 내 옷, 그리고 우리가 메고 있던 가방에도 하얀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의문의 하얀 가루는 바로 '소금'이었던 것이다.


"와, 우리 가족 모두 소금에 절여지는 날이네! 마치 김장 김치용 배추가 된 기분이야..."


카페에서 바람을 피하던 순간, 세상 아늑하고 평온했던 :)




카페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우리는 이미 소금에 절여진 배추 김치 상태였고, 그만 절여지고 싶다면 빨리 올레길을 다 걷는 수밖에 없었다.


숨바꼭질을 뜻하는 곱을락 글자 앞에 숨은 딸내미들^^
막내딸이 제일 이쁘다는 제주말 앞에서 '나야 나'를 외치는 우리 집 막내딸♡
저 파도 너머에 우리의 목적지가 보인다!!


엄마! 어떡해! 우리가 건너야 될 다리가 물에 잠겼어!


앞서 걷던 아이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춘 채, 뒤돌아서 나를 보며 말했다. 듣고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다리가 물에 잠기다니?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어서 당황한 아이들...


정말이었다. 우리가 건너야 할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숲길에서 겪은 침수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두 번째 침수 사건이었다.


'배고픈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다리가 침수되었다..ㅠㅠ
'침수 시 우회'라는 안내 표지판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던...


부애난 오장 뒈싸지키여


제주말로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히겠네'라는 뜻을 가진 말,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속상해도 빙- 둘러서 가는 수밖에...


다리가 침수된 걸 보는 순간, 모두가 이 마음이었다.
덕분에 엄청 많이 돌아서, 겨우 건너편에 도착!


"엄마, 배고픈 다리가 너무 배고파서 물을 많이 먹고 가라 앉았나봐!"


"배고픈 다리만 있었으면 여기까지 금방 왔을 텐데!"


아이들 말대로 한참을 더 걸어야 해서 다리가 욱신거리고 아팠다. '배고픈 다리' 반대쪽 정자에 도착해 귤을 까먹으며 쉬는 내내, 보이지도 않는 '배고픈 다리'에 대고 열심히 화풀이를 했다.


거센 물살 너머로, 아까 망연자실 했던 곳이 보입니다!
목적지인 표선 바다가 보이던 하천 마을을 지나,
소금막 해변에 다다르자...


어? 왜 돌아오세요? 혹시 또 길이 침수 됐어요?


중간 스탬프를 찍을 때부터 함께 올레길을 걷던 분들이 계셨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궂은 날씨에도 잘 걷는다며 칭찬을 해주시던 올레꾼들!


그 분들이 소금막 해변을 따라 먼저 걸어 가셨는데, 이내 우리쪽으로 다시 되돌아 오시는 게 아닌가! 놀란 아이들이 이유를 묻자 친절히 말씀해 주시길,


"얘들아, 이쪽 길도 바닷물에 다 잠겨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더라! 큰 길로 돌아가야 해~"


맙소사! 오늘로 세 번째 겪는 침수 사건이었다. 소금막 해변부터 표선 해수욕장까지 가는 바닷길이 물에 다 잠기다니!


"아! 벌써 세 번째 침수야... 오늘은 진짜 침수의 날인가봐!"


아이들은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인 것을! 길을 찾는 자에겐 또 다른 길이 존재하는 법이니, 큰 길로 나가서 마저 걷기로 했다.


아이들 앞에 걷고 계신 분들이, 세 번째 침수된 길을 알려 주셨다...
원래라면 소금막 해변에서부터 바다와 맞닿은 길을 따라 쭉 걸으면 되는데...
큰 길로 우회해서 걸어온 뒤에 보니, 올레길이 바닷물에 다 잠겨 있었다!




표선 바다만 따라 가면 곧 도착 스탬프를 찍는 곳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퍼붓기 시작했고, 거친 파도에서도 계속 바닷물이 튀어 올라 바다에서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걸어야 했다.


비바람과 파도를 피해 안간힘을 다해 걷는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줄이 풀린 마리가 길 건너편에 있던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악!!!! 엄마!!!! 저 개 뭐야? 나 물 것 같아서 무서워! ㅠㅠ"


둘째를 내 몸 뒤로 숨기며 걷는데도, 큰 개가 자꾸만 둘째의 다리 쪽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빠른 걸음으로 따돌리려고 해봐도 역부족이었다.


남편과 첫째는 먼저 걸어간 뒤라 보이지 않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가에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공포에 질린 둘째를 위해서라도 이 개를 확 걷어 차고 뛸까 생각하던 찰나...


주차되어 있던 차에서 어느 여성분이 차 문을 열더니 개를 불렀다. 분명히 그 개의 주인은 아니었는데, 먹을 것을 보여주며 개를 유인하고 계셨다.


곤경에 처해 있던 우리 모녀를 향해 얼른 가라는 손짓을 보여주신 뒤, 개를 필사적으로 붙들어 두려고 애써 주시던 분... 둘째와 나에게는 정말 생명의 은인이셨다..ㅜㅜ 


"엄마, 개 안 보여? 다시 우리 쫓아오는 거 아니야?"


둘째는 겁에 질려 사색이 된 채로 계속 뒤를 돌아보며 개가 쫓아 오는지를 살폈다. 나는 울먹이는 둘째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겨우 도착 스탬프 찍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아빠를 보자마자 품에 안겨 펑펑 울던 둘째...


아빠!!! 큰 개가 계속 쫓아와서 너무 무서웠어..ㅠㅠ


둘째는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는 아빠를 보자마자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와락 안겨 들었다. 아빠 품에 안긴 채로 위로를 받는 둘째를 보니, 괜시리 부럽기도 했다.


'흑... 여보... 사실은 나도 개가 너무 무서웠어ㅠㅠ'


많은 난관을 헤치고 완주한 3코스ㅠㅠ 감개무량했던 순간!


태풍급으로 불어오던 비바람, 소금을 잔뜩 머금은 채 달려들던 거센 파도, 침수된 길을 만나서 우회하느라 더 많이 걸었던 것, 둘째와 나를 계속 쫓아오던 목줄 풀린 큰 개까지...


우여곡절의 끝판왕이었던 3코스였다! 다 걷고 나니 정말 진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는데, 아무래도 소금에 푹 절여지느라 진짜로 진이 다 빠졌던 걸 수도^^;


올레길 다 걷고 난 직후, 받게 된 안전 안내 문자!!


뒤늦은 안전 안내 문자를 보며, 다음 올레길을 걸을 때는 꼭 일기 예보를 확인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내 몸의 진까지 쏙 빼가고 있는 소금기를 씻어내기 위해 얼른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올레길을 걸을 때 목줄 풀린 개를 만나는 일이 자주 있으니 주의를 요하시길 당부드립니다...


(하지만 저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더라구요ㅠㅠ 개와 최대한 눈 마주치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는 것밖에는...)


오늘의 교훈 : 올레길 걸을 때는 비바람 조심! 파도 조심! 그리고 개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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