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올해 드디어(?) 고3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고3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 현실이 되고 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걱정보다는 믿음으로 지켜봐 주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욕심을 내는 것도 본인이고 공부도 본인이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전부터 서울대 가도록 코칭 하겠다는 저의 제안을 당차게 뿌리치며 편안하게 자신만의 길을 묵묵하게 걸었던 딸이니 욕심을 내봐야 저 스스로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딸 덕분에 일찌감치 깨닫게 되고 나서는 헛고생을 하지는 않는 것에 대해 작은 위로를 삼습니다.
딸이 이전에 실수(?)로 고등학교 첫 내신시험 전교 1등을 했을 때에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미끄러지게 될 것이니 그저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만 즐겁게 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제 예언과 예상대로 신나게 성적이 미끄러졌음에도 언젠가 딸이 자신은 공부를 포함해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을 때 딸에게 선언했습니다.
"아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실제로 그 말이 전교 1등할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1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이고 부담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부는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나 동기와 의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본인의 능력을 떠나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할 마음이 없는데 그 이상의 대학을 진학한다면 고등학교 시절도 그 이후의 대학시절도 혹은 그 이후에도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즐겁게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최근에 자신이 공부하는 책상에 붙여 1년 내내 동기나 의지에 영향을 줄 힘이 되는 고3 좌우명을 적어오라는 데 딸이 적은 문구가 이것이었습니다.
행복할 만큼만
고3이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냐고 기겁을 하는 아내의 반응과는 다르게 저는 그 말을 듣고 마냥 행복하였습니다. 제가 딸에게 바랐던 것을 딸이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가려 한다는 흐뭇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에게 그렇게 정한 이유를 물으니 막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적어 놓으면 선생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것을 보셨을 때도 꾸중하시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그렇게 약간의 도피의 의미를 담아 그런 의도로 적어서 냈는데, 실제로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치열하게 하는 학생에게 “행복할 만큼만”은 쉬어가는 휴식의 의미가 될 수 있지만, 공부를 취미처럼 부담 없이 하는 자신에게는 은근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주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말은 구속력을 가집니다. 그 언어의 영향으로 우리는 의지를 다지고 행동으로 결실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딸의 고3 좌우명이 평생 영향을 주기를 바랍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해야 할 일들을 피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일에 충실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과욕 부리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즐겁게 매 순간을 소중히 지낼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