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11월) 모의고사 후 둘째 딸과 상담

(Feat.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by 청블리쌤

둘째 딸이 11월 모의고사의 무게를 간신히 버텨내며 내게 이렇게 좌절감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대로 될 것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뭘 해도 결론이 정해져있다는 것이니 열심히 할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빠도 정말 열심히 했는데 원하던 서울대를 못 가고 경북대를 가신 걸 보면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는가 싶어요.

위의 질문에 대해 힘들어 하며 무력감을 호소하는 딸에게 얘기해 준 내용에 추가로 생각을 더하여 정리해 보려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예정론처럼 결론이 정해진 것으로 강제로 이끄신다는 의미가 아니란다.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지 않게 될 오류가 전혀 없는, 기계 같은 존재를 원하지 않으셨다. 순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고,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음에도 순종하고 사랑하는 데 가치를 두시며 불순종할 위험을 무릅쓰신 거지. 그래서 우리 삶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더 감동이 되고 진심이 느껴지는 거다.


믿음이란 환경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고정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란다.

너가 그렇게 열심히 안 할 거라는 결정까지 미리 계산하셔서 너의 길을 정해놓았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를... 우리의 계산대로 그렇게 이해가능한, 예측할 수 있는 범위나 방향으로 우리 삶이 진행될 거라는 기대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면제시켜주시거나, 힘든 길을 우회시키신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지.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꽃길을 걸었던 건 아니잖니. 꽃길은커녕 고난의 길을 간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놀라운 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고, 광야의 시간에 우리를 성장시키신다는 사실이란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고 괴로워할 때 더 크게 임하신단다. 아니 원래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는데 결핍과 가난한 마음에서만 제대로 보이는 거겠지.


너는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 것 같니? 아빠의 성공이 서울대진학으로만 정의되었다면 아빠의 모든 인생은 부정되어야 하는 거니?

누군가에게는 서울대라는 길을 허락하시겠지만, 서울대를 허락하시지 않으신 것이 아빠에게는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진 증거라는 고백은 당연히 서울대를 떨어졌던 그 당시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거란다.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에서 학교 입학의 조건으로 계약했던 서울대 진학 시 약속한 4년 장학금도 불합격과 함께 날리면서 대학을 떨어졌던 그 순간은 나의 노력의 부족만으로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커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은 상태로 방황했었단다.


재수해서 경북대를 지원해서 학력고사를 응시했을 때, 그 점수로 서울대를 갈 수도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막상 서울대 지원해서 서울대에서 학력고사를 응시했을 때 그 점수가 나왔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니. 어쨌든 아빠에게 서울대라는 길이 주어졌다면, 아빠는 망가진 길을 걷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한참 후에 들게 되었다. 공부만이 내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정체성이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넘어서 서울대까지 갔다면 나의 교만함은 암처럼 퍼져갔을 거다. 우월감으로 가득 차서 교사를 했더라도 학생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란다. 세상적 기준으로 아빠는 실패한 거지만, 23년 이상 교사로서의 삶을 돌아보면 매 순간이 축복이었고 아빤 매순간 진심과 최선을 다했단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고...


무엇보다 경북대를 갔기 때문에 너 엄마를 만났고, 그래서 네가 지금 아빠랑 함께인 거고. 서울대를 못 간 아쉬움은 있지만, 난 단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너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빤 단 한순간도 너와 더불어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으니...


적어도 아빠에겐 서울대냐 지방대냐가 성공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거라는 걸 삶으로 증명해온 거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신을 가지고 고백할 수 있단다. 내게는 재수하는 광야의 시간도, 서울대 가지 못한 그 이후의 인생여정이, 나의 인생 계획과 기대와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증거라고...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았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축복이란다. 때로는 우리의 계획과 기대를 내려놓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계산 값보다 더 좋고 적합한 길로 인도하실 거라는 인정하게 하는 과정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는 거란다.


하나님의 결론이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넘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포함되는 거란다. 아무리 조급하고 불안해도 잠을 전혀 안 자면서 공부만 할 수도 없고, 매 순간 집중력을 100%로 유지할 수도 없는 거다. 우린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순간 해내는 거다. 자신의 집중도나 눈에 보이는 성취를 비교하거나 다른 아이들의 속도를 비교하지 않으면서, 이 순간 평소보다 공부가 더 잘 안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소소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해보는 것... 그리고 사소한 성취와 성장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내 할 일을 하며 궁극적으로 결국에는 내게 가장 알맞은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는 것... 그러면 불안함과 조급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단다.


아빠가 대학교 다닐 때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과외로 알바를 하여 생활비를 보탰단다. 동기들은 대개 하던 과외를 다 그만두고 임용고시에 집중했지만 아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단다. 저녁시간을 과외로 내어주어야 하고, 할아버지 교회로 매주 다니면서 주말과 주일도 온전히 아빠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도 없었다. 물론 과외하면서 아이들 만나는 건 너무 행복하고 좋았지만 시간의 압박이나 조급함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지. 아빠는 미리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상태여서 졸업과 동시에 군대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조급함으로 대학원, 교육대학원, 임용고시 3가지 시험을 동시에 준비했단다. 뭐 하나라도 얻어 걸리지(?) 않으면 대책 없이 군대를 다녀와서는 미래에 대한 진로가 불투명했기 때문이었지. 시험 준비를 하면서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그때 아빠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찬양이 ‘비전’이었단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요한계시록 7:10)


https://youtu.be/PG2BQDyyoow


복음의 은혜라는 본질에 집중을 하니, 아빠가 느꼈던 삶의 무게는 그보다는 사소하게 보였단다. 내 계획대로 안 되고, 한동안 헤매며 방황할 수는 있고, 얼마든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지만 복음의 본질은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거니까... 아빠는 그 은혜와 축복에 집중했단다. 그것만 해도 가슴 벅차도록 감사한 일인데, 혹 있을 수도 있는 시험에 대한 실패는 그 은혜와 감사를 막아버릴 정도의 영향력은 없는 일이라 생각이 들었지.


틈날 때마다 그 찬양을 하면서 넘치는 평안함과 위로하심을 느꼈단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아빠가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떠나지 않으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그냥 잠겨있고 싶었단다. 그리고 아빠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것부터 주어진 시간 내에 열심히 애썼지. 그리고 3개 다 수석했잖니. 그건 아빠의 목표가 아니었고, 성공이나 행복의 조건 또한 아니었단다. 난 그저 궁극적으로 인도하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은혜에 감격하며 매 순간을 즐거워하며 성장하는 축복을 누렸을 뿐이었고, 수석합격은 그저 덤으로 주어지는 사소한 기쁨이었을 뿐이란다.


“어쩌다 보니” 얻게 되는 기쁨은 그런 거란다. 결론을 정해 놓지 않고 하는 데까지, 가는 데까지만 가는 것...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느끼게 되는 것처럼... 언니도 “어쩌다 보니”의 좋은 사례인 거잖니.



네가 재수 안 하고 바로 서울의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알고 있단다. 언니에게도 그런 소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수능으로 경북대 갈 성적만 나왔을 때 언니에게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그 이후의 삶의 기대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행복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어쩌다 보니” 전혀 기대도 안 했던 논술 추가 합격의 소식이 들렸던 거 기억나지?



너도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눌려 지내지 않으면 좋겠다. 이번 모의고사 영어시간에 쏟아지는 잠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스스로 머리를 모질게 때려가면서 시험에 집중하려고 애썼다는 너의 말에 아빠는 눈물이 났단다. 너의 포기하지 않은 간절함에 감동이 되면서도 가슴이 아파서.

그렇지만 너가 전에 편지에서 했던 이 말을 기억하며 편안하게 최선만 다하면 좋겠다.


제가 서울로 대학 가면 누구보다 기뻐해 주실 거고 대구에 남아도 효도했다고 해주실 거니까 부담 없이 더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부터 1년간 열심히 잘 해보자. 또 잘 할 수 있을 거다. 분명 넌 중학교 때보다, 고1 때보다 더 성장하고 실력이 늘었단다. 그리고 너의 노력도 너의 실력과 성장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아빠는 당장의 모의고사 성적보다 너가 바른 방향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과 너의 잠재성과 이후의 너의 애씀과 노력의 모습을 생각하면 확신을 갖고 너에게 베팅할 수 있을 정도란다.


혹 1년간 너의 최선을 다한 후, 행여 소망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더 큰마음의 간절함이 일어난다면 재수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거다. 아빠도 재수하는 것이 처음부터 계획도 목표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광야의 은혜 같은 시간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니 미리 많은 상상을 하지는 말자.


이번에 한 수능장에서 10분마다 큰 소리를 감독관에게 시간을 물어보고 소란을 피워서 수능에 큰 방해가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단다. 그런 상황이 물론 일어날 수 있지만 미리 다리를 심하게 떠는 학생 옆자리 앉게 되거나, 내 옆에서 맨손체조 열심히 하는 감독관을 만나게 되는 걱정을 미리 할 필요는 없단다. 우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변수보다 더 중요한 본질에 충실하며, 겸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배워갈 뿐인 것이니...


앞으로 수능치는 날까지 너가 공부하지 많아야 할 수많은 이유들이 널 힘들게 할 거다. 너보다는 늘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주변 친구들(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만), 너보다 훨씬 더 성적이 잘 나오는 주변 친구들, 그리고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좌절감... 아무래도 그건 모의고사칠 때마다 느끼게 되겠지만... 누구 말대로 고3 첫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성적이라는 저주 같은 말을 들을 때도... 근데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기로 받아들이고 선택한 학생들에게만 맞는 말이라는 거 얘기했지. 물론 그렇게 받아들이는 애들이 대부분이라서 그 말이 진리인 것처럼 전해지는 것이긴 하지만... 수능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학생들 중에 인생점수로 그동안의 멈추지 않은 노력을 증명한 많은 제자들 사례들도 많이 얘기해주었잖니.



수능 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가능성이지만 수능 후에는 모든 게 현실이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고3 학생들에게 늘 주문처럼 외쳤던 이 말을, 이제 너에게 현실적인 느낌을 담아서 해줄 때가 왔구나.

공부 안 하는 게 오히려 당연해 보이는 많은 당위성들에 맞서서, 주변에서 속삭이는 멈춤에 대한 유혹의 말들에 맞서서, 모의고사 점수의 좌절감을 넘어서서... 넌 그저 수능 때까지, 수능 마치는 그 순간까지 너가 할 수 있는 것만 쏟아부으면 된단다.


1년의 너의 여정을 아빠가 늘 함께 할게. 아빠한테 이렇게 솔직하게 너의 마음을 다 얘기해 주어 아빤 고맙고 기쁘단다. 결국 아빠가 했던 말을 또 반복하고, 때로는 꼰대 같은 소리도 하겠지만, 너의 고통과 아픔을 아빠가 다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너와 함께 아파해줄게.


그리고 오늘 너무 욕심내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편하게 잠을 청하렴. 너가 느끼는 부족함은 오늘 다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란다. 시험문제 풀 때도 어려운 건 일단 넘어가며 훗날을 기대하는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 오히려 너에게 더 큰 성장과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니...


힘내렴. 우리 딸 기도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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