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철학가 키케로와 단테 신곡 사이 어디쯤
커피 마시며 단테 — Coffee with Dante
# 1
이성과 사랑 사이에서,
인간은 길을 묻는다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삶의 한가운데서 문득 멈추었다. 발밑의 길이 사라졌고, 나무들은 빛을 가렸으며, 어디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의 첫 행을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삶의 여정 한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 Dante Alighieri, 『신곡』 지옥편 제1곡
인류 전체의 고백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어두운 숲 속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 숲의 이름은 때로 중년이고, 때로 실패이며, 때로 사랑의 상실이고, 때로 그냥 — 아무 이유 없는 공허함이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둠이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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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보다 천사백 년 앞서, 로마의 한 웅변가도 같은 질문 앞에 섰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그는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카이사르가 죽고,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잡고, 공화국이 무너져 내리던 그 시절, 키케로는 칼날 같은 문장으로 맞섰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도망치다 붙잡혀 목이 잘렸고, 그 손은 잘려 광장에 전시되었다. 글을 쓴 손이었기에.
그가 남긴 문장들은 그러나 죽지 않았다.
Historia magistra vitae.
역사는 삶의 스승이다.
Virtutis laus omnis in actione consistit.
덕의 모든 영광은 행동에 있다.
— Marcus Tullius Cicero
키케로의 문장은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의 돌 같다. 그는 이성으로 세계를 판단했고, 덕으로 삶을 설계했으며, 의무로 인간의 존재를 정의했다. 그의 철학서 『의무론(De Officiis)』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삶의 원칙들. 그것은 결국 이런 말이었다 —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은 시대를 넘는다. 공화국이 무너지던 로마에서도,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의 유배지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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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키케로를 읽었다.
베아트리체가 죽은 뒤, 슬픔에 잠긴 단테는 위로를 찾아 책을 펼쳤다. 그가 집어든 것이 키케로의 『우정론(De Amicitia)』이었다. 단테는 훗날 고백한다 — 그 책이 자신을 철학으로 이끌었다고. 이성의 언어가 상실의 고통을 달래주었다고.
그러나 단테는 키케로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성만으로는 지옥을 통과할 수 없었다. 단테의 여정에서 베르길리우스 — 이성의 상징 — 는 연옥의 꼭대기에서 멈춘다. 이성이 데려다줄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다. 그 너머, 천국으로 가는 길은 베아트리체 — 사랑과 신앙 — 가 이끈다.
키케로가 이성의 언어로 덕을 노래했다면,
단테는 사랑의 언어로 구원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 두 목소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성 없는 사랑은 맹목이 되고, 사랑 없는 이성은 공허해진다. 인간은 그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만 온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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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 앞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신곡』 지옥편 제3곡
우리가 이미 이 문을 통과해 본 적이 있다. 희망을 버려야 했던 순간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느꼈던 밤들. 지옥은 저 세상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의 내면에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몇 번씩 그 문을 통과한다.
그러나 단테는 지옥을 통과한다.
도망치지 않는다.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모든 것을 본다. 탐욕과 분노, 배신과 절망,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어둠을. 그리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빛에 닿을 수 있음을 안다. 어둠을 우회하는 길은 없다. 통과하는 길만 있을 뿐이다.
키케로도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했다.
Dum spiro, spero.
숨 쉬는 한, 희망한다.
— Marcus Tullius Cicero
희망은 상황이 좋을 때 갖는 것이 아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 즉, 살아 있는 한 —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낙관주의가 아니라 의지다.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다. 쓰러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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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모두 추방당했다.
키케로는 정적들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났고,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평생 돌아가지 못했다. 고향을 잃은 자들. 그러나 그들은 유배지에서 가장 위대한 글을 썼다. 키케로는 망명 중에 철학서들을 완성했고, 단테는 추방 이후에 『신곡』을 썼다.
상실이 그들을 더 깊이 만들었다.
뿌리 뽑힌 자만이 뿌리의 의미를 안다. 집을 잃은 자만이 집의 온기를 기억한다. 그들의 글이 천 년이 넘도록 읽히는 이유는, 그 문장들이 안락한 서재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상실과 고통과 추위 속에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문장을 단단하게 만든다. 슬픔은 언어를 깊게 만든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고통에서 나온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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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or che move il sole e l'altre stelle.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 『신곡』 천국편 마지막 행
단테는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신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 하지만, 언어는 그 앞에서 무너진다. 그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것은 단 하나의 단어 — 사랑(amore). 우주를 움직이는 것, 별들을 궤도에 올려놓은 것, 인간이 지옥을 통과하게 만드는 것 — 그것은 사랑이다.
키케로는 이성으로 시작했다. 단테는 사랑으로 끝났다.
그러나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이란 결국 진리를 향한 사랑이고, 사랑이란 결국 상대를 향한 이성적 헌신이니까. 철학과 시는 다른 언어를 쓰지만, 같은 곳을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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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어두운 숲 속에 서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올바른 방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아침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천사백 년 전 로마의 웅변가와, 칠백 년 전 피렌체의 시인을 떠올린다.
그들도 길을 잃었다. 그들도 추방당했다. 그들도 희망을 버리고 싶었던 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썼다. 이성으로 덕을 쌓겠다고, 지옥을 통과해서라도 별들에 닿겠다고. 그 문장들이 지금 여기까지 흘러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그 흐름에 합류하는 일이다. 천 년 전 사람들과 같은 질문을 품고, 같은 어둠 앞에 서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문장을 이어가는 일. 나는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저항이라고 믿는다.
글
달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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