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꼭 운전자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전자가 왜 굳이 차를 세워가며 이방인을 태워주겠는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재밌으니까! 내가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유와 운전자의 이유를 연결했다. 그러니 운전자가 졸지 않고 즐거운 운전을 할 수 있도록 재밌는 얘기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그러나 막상 히치하이킹을 하다 보면 음악도 없이 고요할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그런 침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초조했다.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히치하이킹 커뮤니티에 물어봤다. 선배님들은 꼭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적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 부부가 그랬다. 얼마나 조용했는지 차를 멈춘 것도 몰랐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려 내 커다란 짐을 트렁크에 넣었다. 택배 값이 싸기로 유명한 폴란드에서 부친 그 짐은 끄는 것조차 힘들었을 만큼 무거웠다. “Labai ačiū! Labai ačiū!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이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듣기 좋은 라디오 사이로 들리는 차분한 부부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들이 편안했다. 정적이라는 건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만 있어도 좋은 것이었다.
언어장벽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다. '그냥.' 그냥 조용히 가고 싶어 하는 운전자도 있다. 대화를 하고 싶어서 태워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말 없이 가고 싶을 수도 있다. 내가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유가 하나가 아니듯 운전자가 나를 태워주는 이유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딸 또래의 아이가 걱정된다거나,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다거나, 학생 때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거나, 그런 다정함들 때문이었다.
조용한 트럭 운전자를 옆에 두고 한참 밀린 일기를 썼다. 어디로 가는 길에서, 어떤 운전자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썼다. 이 조용한 아저씨와는 쓸 이야기가 많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트럭은 한 번에 먼 길을 간다. 보통 큰길을 따라가기에 국경을 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말없이, 국경을 넘고, 일기를 썼다가, 경치를 구경했다가, 졸았다가 했다. 운전자는 휴게소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다른 차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운전자도 나와 함께 내렸다. 화장실에 가시려나. 아저씨는 화장실이 아니라 나를 태워줄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아저씨는 살짝 어색해하며 다른 운전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사람과 나눈 것은 침묵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안에 쑥스러움과 다정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을 조금은 덜 어색해하게 되었다. 그런 순간 속에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건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