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 면접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지금 이 질문을 받았더라면 단박에 합격했을텐데. 함께 면접을 본 그 누구도 그토록 더럽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텐트를 치고, 공항에서 자다보면 삼사일은 기본이고 일주일씩 못 씻기도 한다. 다행이었던 건 여행을 시작한 6월말의 유럽은 꽤나 시원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슬을 겨우 막는 텐트와 얇은 여름 침낭 때문에 추위에 떨며 자는 날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간 넘게 해를 쨍쨍 맞으며 손을 흔들다보면 어느 순간 온몸이 찐득해질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물티슈로 닦아내거나 휴게소의 화장실에서 물을 묻혔다. 머리는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으로 족했다.
이렇게까지 해내고 싶었던 것은 한계가 여행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행 중 핸드폰을 도둑맞은 것이 발단이었다. 2주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2째날에 핸드폰이 사라졌다. 핀란드 산타의 마을 로바니에미에서 오로라를 보고, 러시아로 내려와 겨울궁전이라고 불리우는 상트페테부르크를 돌고, 아기자기하기로 유명한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거치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산타의 마을에서 오로라를 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산타는 내 눈물을 쏙 빼놓고선 달래듯 다른 선물들을 내놓았다.
초특가 할인으로 나온 버스 예매표와 로바니에미에서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구한 것 말고는 준비한 것이 없었다. 짜여진 여행에 지쳐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었다. 호스트와 약속 시간과 장소도 정하지 않은 채였다. 산타가 준비해놓았던 첫 번째 선물은 핸드폰을 잃어버린 그 공항에 태블릿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태블릿으로 급하게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지금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했으면 좋겠다고. 운 좋게도 호스트는 곧장 메시지를 보고 바로 마중을 오겠다고 했다. 그 날 호스트와 밤새 이야기하느라 오로라를 볼 생각도 못했다.
산타가 준비해둔 두 번째 선물은 예매해둔 버스에도 태블릿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산타도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 전기가 통하는 문물이라는 것을 아나보다. 버스 좌석마다 붙어있는, 터치가 잘 되지 않는 태블릿으로 호스텔을 구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종이에 호스텔 주소와 약도를 삐뚤빼뚤하게 옮겼다.
산타가 한가득 준비했던 최고의 선물은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GPS가 장착되지 않은 종이지도를 보고 자주 헤맸다. 길을 잃었냐며 먼저 다가와준 아줌마는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며 터미널까지 함께 걸어주었다.
괜히 물어봤나 싶을 만큼 무뚝뚝해 보이는 청년도 있었다. 영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학생같은 사람에게 내가 옳은 방향의 기차에 탄 건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서울의 지하철조차 헷갈리니까. 잔뜩 긴장한 채로 내려야 할 역을 세고 있는데 그 청년이 다가와 알려주었다. 이제 내가 내려야 할 역이라고.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닫히는 기차 창문을 사이로 출입구를 가리켰다. 그 뚱한 청년은 어느새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날씨만큼 차갑다고들 한다. 영어에 겁에 질려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노 잉글리쉬, 노노노”하며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계속 물어봐야 했다. 나는 길치니까. 내 엉터리 러시아어에 귀를 기울여주고 유창한 러시아어와 격한 손짓으로 대답해주던 할머니 덕에 목적지를 찾았다. 술에 취한 것 아닐까 살짝 비틀거리던 아저씨도 내 엉성한 약도와 꼬부랑거리는 러시아 주소를 보고 함께 길을 찾아주었다.
빵집 알바생은 핸드폰을 빌려주고 마카롱을 선물로 주었다. 알바를 쉬는 날에는 도시 구경을 함께 했다. 그 베이커리는 아침 7시,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날에도 유일하게 노란 불을 빛내고 있었다. 새벽같이 터미널에 도착해 예약해둔 호스텔을 한참 헤맸다. 간신히 찾았지만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눈 쌓인 길은 엽서의 한 장면 같았지만 무거운 가방과 칼날같은 바람에 지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멀리서 보이는 빵집 불빛이 너무나도 따뜻해보였다.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던 알바생은 잔뜩 당황했지만 열심히 내 얘기를 들어주고 호스텔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알바생은 아침으로 먹으려고 산 빵에 마카롱을 함께 포장했다. “This is for you. 이건 너를 위한 거야.” 지치고 힘든 나를 위한 것이라면서. 그 이후로 마카롱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최악의 상황은 최고의 여행을 선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돌아가기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지칠대로 지쳐 전기장판을 켜둔 침대에 파묻히고 싶단 생각뿐이었는데 말이다. 하나하나의 망설임과 순간순간의 도전에 하루하루 더 씩씩해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 따뜻한 사람들에, 새롭게 찾은 내 모습들에 여행이 충만해졌다. 앞으로도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런 여행을 위해 히치하이킹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