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킹을 하다 보면 종종 용감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혼자 여행하는, 스물 언저리의 여학생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에이, 그렇지도 않아요~’의 일종인 ‘으흠, 딱히 아녜요. Hmm, Not really.’식의 반응을 하곤 했다.
용감한 건 내가 아니라 내가 용감하다고 말해주는 운전자였다. 못 본 척해도 아무 상관없는 이방인에게 눈 맞춰주고,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주고, 또 기꺼이 차를 멈추어준 사람들이었다. 그 용감한 사람들 앞에서 씩씩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어디서 히치하이킹을 시작할지 고민하는 순간부터 두려웠다. 나는 그렇게 용기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도전이 끊이지 않았던 위인전과 모험으로 넘쳐나는 소설책들을 읽으며 내가 만약 주인공이었다면 시시하고 허무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마음을 다독였다. 거절당해도, 거절해도 괜찮다고 토닥였다. 사실 나는 쫄보였다. 옆자리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리는 일조차 망설였다. 아끼는 책을 꾹꾹 눌러서 보는 친구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빌리는 것도, 빌려주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히치하이킹은 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하고, 거절하는 것에 당당해야 하는 것이 히치하이킹이다. 사실 거절당하는 것보다 거절하는 것이 더 곤혹스러웠다. 운전자를 마주했을 때 기분이 찜찜하다면 타지 말아야 한다. 알면서도 무례한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육감을 이유로 운전자를 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건 마치 이런 상황 같았다. 과자가 먹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위해 아껴두었던 새 과자를 뜯었다. 뜯자마자 풍기는 고소한 과자 냄새. 아이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안 먹겠단다. 그래도 아이에게는 오감이라는 뚜렷한 근거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무례함이 무너졌다. 트럭으로 가득 찬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방에 깔린 트럭에도 불구하고 쉽게 차가 잡히지 않았다. 한 구석에서 쉬고 있던 운전자가 내게 손짓했다. 높디높은 트럭을 낑낑거리며 올라갔다. 운전자는 영어는 할 줄 몰랐지만 구글 번역기를 쓸 줄 알았다. 데이터가 터지는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뭐 하냐, 어디로 가냐 따위의 꽤나 긴 대화가 오갔다.
“어디로 가?”
“파리로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
“Merci! Merci! 감사합니다!”
“근데 오늘은 배송을 해야 돼서 파리에 갈 수 없어. 내일 같이 파리에 가자.”
코앞에 최종 목적지인 파리가 있었다. 왜 굳이 기다렸다가 가야 하지? 육감이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노크했다.
“오늘 파리에 가고 싶어요. 다른 트럭을 알아볼게요.”
운전자는 몇 번이나 빙빙 돌려 예의 바른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결국 돌직구가 왔다.
“I want to make love with you. 너와 사랑을 만들고 싶어.”
“NO THANK YOU.”
거절하고도 이토록 후련한 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환대로 이어가는 여행이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예의가 아니라 안전이었다. 내 여행은 나를 위해 존재해야 했다.
용감해서 히치하이킹을 한 것이 아니라, 히치하이킹을 해서 조금은 용감해진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히치하이킹을 생각하면 많이 설레고 조금 걱정스럽다. 나는 그냥 걱정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