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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채원 Oct 19. 2021

사랑을 꿈꾼다면 히치하이킹을 하라!

여행에서의 로맨스


나는 사전조사를 크게 하지 않고 여행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야 유명한 곳이구나, 아름다운 곳이구나 깨닫게 될 때가 많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블로그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멋진 도시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돈뎃Don Det이었다. 돈뎃은 라오스의 매우 남쪽, 캄보디아와 국경과 접한 곳이었다. 베트남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정에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 갔던 것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R과는 Pakse팍세에서 만났다. 팍세는 시골인 탓인지, 우기인 탓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서양인을 만난 것이 신기했고, R은 히치하이킹을 하는 동양인이 신기했다. 걷는 길이 겹쳐 몇 마디 나누게 되었고 저녁도 함께 먹게 되었다. R은 라오스를 스쳐 지나가려고 했던 나와는 달리 라오스에 명확한 이유 때문에 라오스에 왔다. 라오스의 맥주를 마시는 것과 돈뎃에 가는 것. 팍세까지 왔으면 천국이라 불리는 돈뎃에 가야 한다고 했다. 저녁밥을 안주삼아 호랑이가 그려진 맥주를 마셨다. 이제 돈뎃에 가는 일만 남았다.


작은 섬 돈뎃은 생각처럼 예쁘진 않았다. 그러나 돈뎃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메콩강은 아름다웠다. 강물이 파란빛으로 빛나고, 물고기가 뛰어놀고... 와 같은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우기 때문에 강은 사나웠고 짙은 흙빛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처럼 넓은 강과 그 사이로 비죽 솟은 작은 섬들의 나무들, 그 억센 물줄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과 웅장함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억수 같은 비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졌다. 세찬 바람에 우산이 망가졌고, 땅은 질척거렸다. 배가 오가고, 숙소가 밀집되어 있는 중심지조차 흙탕물이었다. 멀리 나갈 수 없었다. 대신 해먹에서 늘어지는 낮잠을 자고, R과 메콩강을 앞에 두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R만 웃어댔던 시트콤을 보고, 비건인 R이 좋아하는 인도음식을 실컷 먹었다. 나는 그에게 왜 비건이냐고 묻지 않았고, 그는 내게 왜 히치하이킹을 하냐고 묻지 않았다. 비건과 히치하이킹은 각자 삶의 중심인데도, 묻지 않았다. 매일 듣는 질문을 더 보태지 않겠다는 일종의 배려였을 테다.


R은 돈뎃에서 일주일 이상 머물 거라던 계획을 취소하고 함께 팍세로 돌아왔다. 헤어지기 전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 하는데도 맥주를 실컷 마셨다. R은 그가 좋아하는 책 속의 주인공이 나를 닮았다고 했다. 그는 “Don’t change! Stay different!”이라는 문구와 함께 책 ‘시녀 이야기’를 선물했다. 나는 한국풍의 무늬가 있는 엽서에 고마움의 마음을 담았다. R은 아침 일찍 히치하이킹을 하러 떠나는 나를 향해 한참이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누군가를 배웅하는 일에 서툴다. 헤어짐 뒤에는 아쉬움, 미련, 섭섭함이 가득 남는다. 그래서 매번 뒤돌아보게 된다. 종종 상대방은 망설임 없이 떠나고 있었다. 그 단호함을 보는 것이 조금은 서러웠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매번 다짐했었다. R은 그런 다짐을 아는 듯 손을 흔들어주겠다고 했다. R은 내가 뒤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R은 서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커다랗게 손을 흔들었다.


R이 그토록 다정했던 것이 로맨스인 줄도 몰랐다. 여행을 끝내고 일상에 지쳐 있을 때 연락이 왔다. 자신에게는 로맨스였다고. 내 여행 호러 스토리들에 놀라 로맨스보다는 힐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화장은커녕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얼굴, 빛바랜 티셔츠, 흐늘거리는 냉장고 바지를 보고 사랑에 빠지기란 쉽지 않을 테다. 히치하이킹에는, 여행에는 그런 마법이 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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