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는 히치하이킹을 하기 정말 좋은 나라다. 라오스 사람들은 (나를 태워준 사람들조차) 다들 이 나라에서는 안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10분 이상 기다려본 적이 없었다.
예약해둔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라오스를 통과해 베트남으로 가야 했다. 히치하이킹으로 국경을 넘고 베트남에서 며칠을 보내기에는 조금 빠듯해 보였다. 베트남과 이어지는, 최단 거리의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내 소개와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유를 적은 쪽지는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게 되었다. 다들 그냥 태워주었기 때문이다. 남부 라오스에는 고속도로와 같은 큰 도로가 많지 않고, 차도 많지 않다. 차는 적은데 히치하이킹은 쉬웠다. 보이는 족족 태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녀가 장사를 하는 커다란 벤도 타고, 자두빛이 예쁜 용과(드래곤푸르츠)를 챙겨준 아저씨도 만났다. 나를 손녀처럼 예뻐하는 할아버지도 만났다.
순조롭게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자꾸 문제가 생겼다. 모녀가 장사를 하던 벤이 펑크가 났다. 이렇게 반나절이 갔다. 할아버지는 내게 차를 대접한다며 카페로 초대했다. 이렇게 또 반나절이 갔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친구들이 베트남으로 가는 그 길은 산사태로 막혔다고 했다. 한나절을 꼬박 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은 허무할 만큼 짧았다.
히치하이킹을 마무리하기에는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4시. 해가 지기 전에 머물만한 마을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가며 본 라오스의 큰 도로들에는 중간중간 동남아풍이 물씬 나는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서 노숙을 해야겠다, 큰 마음을 먹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왜 차가 안 잡히지. 손만 들어도 차가 잡혔었는데...’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러움에 더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데 누군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금발에 이제 막 흰머리가 희끗거리기 시작한 할머니가 마치 내가 이 동네의 주민인 것처럼, 어제도 오늘도 본 사이인 것처럼 다정하게 인사했다. 그 할머니도 웬 여자애가 차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겠지만, 관광객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이 시골 마을에 나를 제외한 외국인이 있는 것이 더 신기했다.
“Where are you going? 어디가?”
“I’m going to Vietnam! 베트남에 가요!”
“Isn’t it too late to go? 너무 늦지 않았니?”
“Yes, it is, but accommodations here are out of my budget. 그건 그런데, 여기서 묵기에는 좀 비싸서요.”
“Then do you wanna come with me? 그럼 우리 집에 갈래?”
“Sure! 좋아요!”
할머니는 내 망설임 없는 “Sure!”에 좀 놀라신 듯했다. 할머니 L을 따라간 집에는 할아버지 R이 L만큼이나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L과 R은 호주 사람으로, NGO에서 일하며 2년 넘게 라오스에서 살고 있었다. 노부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함께 해나가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꼭 붙잡던 노부부의 사랑에는 싸움 따위는 없었을 것 같았는데, 많이 싸웠다고 했다. 힘들던 시기도 있었지만 서로 의지하며 이렇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어로 된 영화를 보며, 냄비로 만든 팝콘을 먹었다. 씻지 못해 꼬랑내 나는 발가락 위로 북실북실한 바퀴벌레가 걸어가는 끔찍하면서도 요란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행복했다. 장마로 인해 끈적해진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노숙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지붕이 있는, 침대가 있는 방에서 자게 되었다.
다음날 출근을 하는 할아버지 R과 함께 집을 나섰다. 손에는 할머니 L이 쥐여준 캥거루 모양의 열쇠고리가 있었다.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한참 뒤에 R이 되돌아왔다. 기도를 깜박했다면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빌어주었다. 안락한 잠자리보다 더 감사했던 것은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그렇게 돌아왔구나 싶었다. 그러니 돌아가게 되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돌아가는 길목에는 더 멋진 일들이 일어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