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가에서 하는 히치하이킹은, 아니 도로에 서는 매 순간은, 즐겁기도 하지만 걱정스러움이 앞선다. 태국에서 처음 히치하이킹을 할 때도 그랬다. 히치하이킹 장소를 앞에 두고 망설였다. ‘안 되면 어떡하지, 그냥 기차를 알아볼까.’ 그러다 ‘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싶었다. 최악의 상황은 차를 타지 못하고 기차를 타는 것이다. 차를 타지 못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왜 벌써 기차를 탈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로 위에 서자.
지도로 봐 두었던 곳은 고속도로 위, 버스정류장처럼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넉넉한 공간에 차를 안전하게 세울 수 있겠다 좋아했었는데, 원래 그런 용도의 공간이었다. 버스정류장이었기 때문이다. 6차선 고속도로 한복판에 있는 버스정류장이라니... 멈춰서는 차들은 모두 벤의 모양을 한, 번호가 없는 버스였다. 승객들은 번호도 없는 버스를 망설임 없이 골라 탔다.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자꾸만 왔다 갔다 해서 손을 흔들기 민망했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흔치 않은 아시안 얼굴 덕분에 여행자스러웠지만, 이제는 태국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을 만큼 현지인스러웠다.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모자를 고쳐 쓰고, 승객들과 거리를 두고 방방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사인지 승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쪽지를 보여줬다. 쪽지에는 나를 소개하는 한두 줄의 문장과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유 등이 태국어로 적혀있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버스에 타라고 했다. 버스정류장이라는 뻘쭘함이 금세 감사함이 되었다. 그렇게 에어컨 빵빵한 버스를 한참 탔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 가득했던 옆에 앉은 학생에게도, 아주머니에게도 쪽지를 보여주었다. 옆에 앉은 학생과 구글 번역기로 나눈 대화는 버스 앞뒤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모두가 내가 스무 살이라는 것에 놀랐고, 모두가 내가 혼자 여행한다는 것에 몹시 걱정했다.
기술발전 덕분에 대화할 수 있었던 학생이 내리고, 영어공부 덕분에 버스에서 유일하게 소통이 되었던 아줌마와 미소를 텄다. 아들이 있고 남편과는 사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득하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울상 지으니 아주머니가 미소 지으셨다. 나도 그 얼굴을 따라 다시 미소 지었다가, 이런 이야기에 웃는 얼굴은 아니다 싶어 울지도 웃을 수도 없는 슬픔을 내비쳤다.
그리고 경찰서에 도착했다. 기사님도, 승객들도 걱정 말라며 다음 차를 잡아주겠다고 했었는데 그 차가 경찰차였나보다. 여행을 하다가 경찰서에 간 건 단 한 번, 핸드폰을 도둑맞았을 때뿐이었다. 둘 다 당황스러운 상황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이번엔 기분 좋은 방문이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혼자 다음 차를 찾을 수 있다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공권력을 낭비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경찰관이 거절했다. 그래도 경찰관은 나를 살펴보려는 건지 구경하려는 건지 나와봤다.
대충 가는 길목에 세워달라고 했는데 승객들끼리 어디에 내려주어야 하는가 열띤 토론이 붙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들 사이로 옆의 아줌마가 물어봤다. “You come with me?” 그 짧은 대화에 집에 초대해주시다니 농담인 건가 싶어서 웃어넘겼다. 그렇게 웃고도 설마 진심인가 아리송해져서, 다시 물어보시면 그때는 그러자고 해야지 싶었다. 아주머니네 마을은 고속도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었다. 아주머니가 내릴 준비를 하며 다시 물었다. “You come with me?” “YES!” 그 짧은 대답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받았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아주머니S는 나를 온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나는 그 집 식구가 되었다. 어떻게 먹는지도 몰랐던 과일들과 방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음식들을 먹게 되었다. 축제에서 내일부터 스님이 되는 신도의 머리카락을 깎았고,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만두를 빚었다. 옆집 강아지와 낮잠을 잤고, 가족들의 시내 마실에 따라나갔다. 매일매일이 특별하고, 평범했으며, 기대되었고, 충만했다.
우리 엄마는 누군가에게 초대받는 것을 불편해한다. 우리 아빠는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것을 어려워한다. 민폐를 끼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라 나도 그런 편이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안에 내 진심이 담기지 못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히치하이킹은 누군가의 호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색해하지도 말고, 부담스러워하지도 말고, 그냥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치 어제도 만난 사람처럼. 반찬을 나눠먹는 동네의 친구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그렇게 받은 것들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돈은 아닐 테다. 그것들은 돈으로 환산하기에는 너무 귀하다. 마치 부모님의 사랑을, 친구와의 우정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형태로만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따스한 호의를 베풀었던 것처럼, 하루하루의 행복을 주었던 것처럼, 나도 세상에게 그러겠노라고 말이다. 내가 받았던 행복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받고 전하다 보면 결국 세상이 따뜻함으로 가득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나는 히치하이킹을 꿈꾸고, 언젠가 해낼지도 모를 당신의 히치하이킹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