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7부

by 이지선

경계위의 선택

아침 진료가 끝나갈 무렵, 익숙한 이름이 화면에 떴다.

EMR에서 그녀의 차트를 열자 몇 년간의 기록이 화면에 펼쳐졌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평소보다 굽은 어깨, 한 손은 반대편 손등을 감싸 쥐고 있었다.


"선생님… 저, 이제 약을 그만 먹고 싶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결혼한 지 5년째예요. 아이를 갖고 싶어서 약을 줄였다가, 임신이 안 되면 다시 늘렸다가...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벌써 몇 년이 흘렀어요."

숨을 고른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임신 준비한다고 약을 제대로 못 썼더니 손가락이 이렇게 변형됐어요. 아이도 없고, 손은 망가지고... 이제는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어요.

약을 끊고 한 번만 더 시도해보고 싶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말은 조용히 진료실 바닥에 내려앉았다.


나는 관절의 손상과 재발의 위험, 그리고 임신 중 악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MTX는 중단한 지 오래되었고, 임신가능한 치료제로 겨우겨우 견뎌만 왔었기에 진행이 얼마나 빨라질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설명은 설명일 뿐, 그녀가 지난 5년간 견뎌온 기다림과 포기의 무게를 덮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게요. 안 생기면... 그때는 정말 포기하고 제대로 치료받을게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한동안 공중에 떠 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첫 환자가 나간 뒤에도 진료실 공기는 무거웠다. 그녀가 남기고 간 질문이 벽에 붙어 있는 듯했다.



늦은 용기

이른 오후, 처음 진료하는 환자가 조심스레 초진 차트를 내밀었다.


"사실 그동안은 자연치유, 건강식품, 운동, 명상…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근데 이제 너무 아파지고, 관절이 굳어버리니 겁이 나더라고요. "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부어오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친구들이 병원 가라고 몇 년을 말했는데...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6개월뒤에 딸이 결혼하는데 다들 제손만 볼꺼같아요.

그래서 이제라도 치료를 받아보려고 왔습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이미 부풀고 굳어진 마디가 손끝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까지 걸어온 그 용기는 분명했다.

"지금부터라도 남아 있는 기능을 최대한 지켜봅시다. 포기하지 않고 오신 마음이 무엇보다 큰 힘입니다."



같은 진료실에서,

한 환자는 *"아이와 건강 사이에서 5년을 흔들렸다"*며 지쳐하고,

다른 환자는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애타게 묻는다.


의학적 설명과 환자의 삶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서 있다.

임신과 치료, 미래의 아이와 현재의 고통, 희망과 포기 사이의 벽.

그 벽 너머, 각자는 자기만의 돌을 묵묵히 밀고 있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그러나 같은 무게를 견디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내가 건네는 설명과 위로의 말들이 이 벽에 작은 균열을 내는 사다리가 될까,

아니면 그저 벽을 더 높이는 또 다른 벽돌일까.


한 사람에게는 희망의 사다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절망의 벽돌이 되는 이 아이러니.

오늘도 그 벽을 완전히 넘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벽 앞에서 함께 서 있을 수는 있다.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문 밖에서 다음 환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차트를 닫고, 다시 문을 연다.

벽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우리는 계속 만난다. 벽을 사이에 두고서라도.


이전 07화한계6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