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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Dec 03. 2023

파리에서 찍은 가족사진

수고했다 우리모두

사는게 무엇인지 생각한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근 80년을 살아내야 하는

이 '삶' 이란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때가 되면 피어나고 때가 되면 지는 꽃,

초록이다가 붉었다가 또 노랑이다가, 

종래는 말라서 떨어지고 마는 이파리,  

한 때 묵직하고 거대한 바위였다가

바람에, 추위에, 물살에 패이고 채여 가루로 사라지는

수많은 자연물들과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상의 거창한 의미는 애초에 없던 것 같다.

삶의 목적, 목표란 것이 애당초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인간은 모두 사라지는 것을.


주변의 근 한세기를 살아내시는 어르신들을 가끔 뵈면

가만히,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고요하게 바라보고 계신다는 느낌이다.


한 때 시간이 부족하고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심히 움직였던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어떠한 to do list 도 없이

단조롭고 적막하게, 그리고 아주 아주 느리게 흐른다.

한 점 바람도 없는 호수에 일렁이는 미세한 물결처럼.


그렇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나는 예전부터 두려웠다.


그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어쩌면 좋을까.


건강하게 여행도 하고 취미활동을 하는 노후라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다.


근육이 빠져 오래 걸을 수 없고,

글쓰기나 독서도 충분히 할 수 없을만큼

노쇠해지는 삶의 마지막 챕터를 나는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나는 '행복했던 순간을 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낸 나의 인생 곳곳이 담긴 사진을 보며


- 아, 이 때 정말 좋았지,

- 이건 정말 맛있었어.


라고 추억하는 시간이라면 좋겠다.



은우의 치료가 끝난지 1년.

1년 검사도 무사히 마치고 나서

나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파리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의 목적은 가족 사진이었다.


은우의 진단부터 치료종결까지

충격과 절망, 불안과 극한의 피로를 견뎌낸

우리 가족의, '전우'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기념으로 남기고 싶었고

무엇보다 특별하게 남기고 싶었다.


내가 항상 가고싶은 파리,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내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나이가 들어

생의 마지막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 창가에 앉아 들여다 보며 미소지을 수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머니는 좋아하셨고 남편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파리에서 스냅사진을 찍은 한국인 작가에게 연락하여

촬영 날짜를 예약하고, 비행기 표를 끊고,

널찍한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4살 7살 아이들과 유럽 여행이라,

동남아 휴양지 여행보다는 훨씬 고생스러울 것이었고

실제로도 시차 적응부터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 순간 한 순간이 그저 행복하고 뿌듯했다.



병원 침대에 있던 아이가

지금 내 손을 잡고 샹젤리제를 걷고 있다니.


멸균 우유밖에 못먹던 아이가

몽마르뜨에서 바게뜨를 먹고 있다니.



기적같은 일이었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인생이란 것은 이렇게

코너를 돌면 완전히 다른 장면이 펼쳐지기도 하는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결국은 지나가는구나.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믿기지가 않았다.



사진들은 너무나 아름답게 나왔다.


마냥 행복해하는 나와

피곤해하는 큰 아이와

두리번 거리느라 정신없는 은우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자연스럽게 포착되었다.



300장 가량의 사진을 받고

나는 마치 만기적금을 수령한 것처럼 든든했다.


이제 나의 노후는 준비가 잘 되었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한 장 한 장

추억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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