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이 Jun 09. 2022

졸혼


혼자서 가슴앓이를 한 지 3개월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단칼에 결단을 내렸다. 나의 삶이 더 이상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프랑스에서 살아남기로. 내 삶의 운명을 나 스스로 거머쥐기로. 우리의 결혼에 종지부를 찍기로. 그에게 새로운 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기로.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나는 옆에 누운 남편이 깨자마자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그가 원하면 이혼을 해주겠다고. 내 걱정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겠냐고. 그리고 진심으로 그의 새로운 사랑과 행복을 빈다고. 그는 아무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갔다.  나도 그를 뒤따랐다. 마침 딸아이가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주말이라 집에 없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어떻게 그런 결단을 단칼에 내릴 수 있냐면서 그런 내가 부럽고 동경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굳이 이혼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 이혼을 요구하면 응하겠냐고. 그럴 경우 물론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행복을 빌어주면서 우리의 공식적인 헤어짐을 선언했다. 요즘 말로 하면 졸혼을 선포한 셈이었다.

사실 신의 계시처럼 하루아침에 내려진 결단이라고 했지만, 3개월간 지켜본 그의 행동에 대한 내 판단과 그리고 내면의 깊은 갈등과 숙고의 총체가 그 결단에 기여했으리라. 아직 결단을 내리기 전 어느 날이었는데, 그는 나의 눈물과 우울함을 보고 죄책감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저쪽 사랑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어쩌면 식물인간처럼 살아갈지도 몰라. 

나는 곧바로 그에게 대답했다.

— 아니야, 난 결코 당신이 식물인간처럼 살아가길 원하지 않아. 집에 자주 오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당신의 사랑을 살러가.

나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가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나이기에 그의 말이 거짓이나 협박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사랑의 정열은 불태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치거나 얼이 나간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때 나에게 빠져 갈피를 못 잡았던 그를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를 통해서도 익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은 그가 출장을 가서 내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날도 내가 여전히 우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그 역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언제나 당신을 보살펴 줄 거야. 당신의 영원한 수호자가 되어주고 싶어 »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더 목이 메고 눈물이 나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그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전화기만 한동안 붙들고 있다가 그대로 끊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여러 해 전부터 그와의 결혼 생활이 내게 지루하고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가 몇 번이나 지적한 내 무관심이 그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남자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인간됨을 여전히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그가 불행해지는 걸 결코 바라지 않았다. 점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그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을 앞섰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남편과의 결별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헤어지자고 한 날, 남편은 우리의 관계를 딸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할 때까지 비밀로 하자고 제의했고 나는 순순이 승낙했다. 비록 잦은 출장 때문에 많은 시간을 딸과 함께 보내진 못했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하늘에 별이라도 따올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그는 누구보다도 좋은 아빠임을 나는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직 중학생이었고 한창 예민한 나이에 접어드는 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댁 가족에게도 당분간 비밀로 할 것에 서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 ‘당분간’이 십 년 이상의 긴 세월이 될지 누기 알았으랴. 사실 그렇게 오랫동안 비밀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직업상 출장이 잦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전 09화 남편의 손가락에서 사라진 결혼반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