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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Jun 09. 2022

남편의 손가락에서 사라진 결혼반지


남편과의 관계는 시간과 함께 점차 악화되어갔고 그것은 하루하루가 내게 지옥 같은 삶이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이어가던 차에 2004년 성탄절을 맞이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매년 우리 가족은 시댁이 있는 낭트라는 도시로 내려가서 큰 집을 가지고 있는 시누이 댁에서 온 가족이 모여 성탄절을 보내곤 했다. 이 날은 우리 시어머니의 전 남편이자 시누이의 친아버지이며 남편의 행정적인 아버지인(남편은 시어머니가 한때의 짧은 연애로 20세에 낳은 아들이다)  시아버님도 함께 참여해서 시어머니의 현재 남편과 악수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는데, 나는 처음에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신기해했더랬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남편이 스무 살 때 이혼하고 각각 재혼을 했는데, 시아버님의 부인은 재혼 후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줄곧 혼자 살아오셨단다. 몇 년 성탄절을 함께 보내면서 느낀 바로는 두 분이 참 잘 헤어졌다는 생각이었다. 이혼한 지 오래이고 1년에 한 번 만나는데도 두 분은 만날 때마다 티각태각 자주 말다툼을 하는 한마디로 성격차가 극심한 커플이었다. 반면 시어머니는 현재 남편과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나를 아주 좋아해 주시던 시아버님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신다.

그 해 2004년에도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전야에 시누이 댁에서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둘러싼 저녁 만찬회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나는 하늘이 샛노래지는 듯한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남편의 손가락에 늘 끼워져 있던 결혼반지가 사라졌던 것이다. 사라진지는 이미 몇 개월은 되었을 법 한데 나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내 눈에 띄었을까?

갑자기 머리가 아득해지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의 외도에 대한 감이 왔다. 아니라고 했던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간 문득문득 의심했던 조짐들을 애써 외면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까? 모든 가족 앞에서 남편의 파렴치한 불륜을 폭로하고 울분을 토하며 가족의 성탄절 만찬회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 화장실로 도피해서 막 북받쳐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일단 남편에게도 알리지 말고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탄절을 무사히 보냈고 이틀 후 우리 가족은 파리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중  점심시간이 되어 고속도로를 벗어나 식당을 갔는데, 그때서야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딸아이가 함께해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았는데, 그런 나를 보면서 남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12월 31일 연말 송년회의 만찬회에는 축제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이미 약속해놓은 나의 모로코 친구 부부와 그들의 두 아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일 년 만에 모처럼 보는 친구들이라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새벽 두 시경 친구들이 떠났다. 남편과 나는 대충 식탁을 정리하고 침대로 갔다. 그때 문득 계획하지도 않은 말이 자발적으로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 오늘 우리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눌까?

사실 남편의 태도가 달라진 이후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거의 사랑을 나누지 않은 상황이었다. 늘 성적 욕구가 왕성해서 내가 귀찮아할 정도로 나를 원했던 평소의 그 답지가 않아서 한동안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것을 권태기와 갱년기의 증상으로만 취부 해 왔는데 이제 그의 외도를 거의 확신한 상황이었기에 어쩌면 내 무의식이 뱉어낸 말일지도 몰랐다. 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빈정거림과 반 농담이 섞여 있기도 했다. 남편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놀라며 반문했다. 

— 마지막이라니 왜 그런 엉뚱한 말을 하지? 오늘은 피곤하고 시간도 늦었고 하니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냥 자자고.

— 다음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오늘 밤이 아니면 우리가 사랑을 나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들어가 누운 남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내가 불편해서인지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 당신,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니, 해야만 하는지 전혀 짐작이 안가?

남편이 계속 침묵을 고수하고 있어서 나는 내친김에 모든 걸 쏟아냈다. 성탄절 전야에 그의 손에 더 이상 결혼반지가 없음을 발견했다는 사실과 그의 외도에 대한 확신을. 그제야 그는 눈을 뜨며 죄의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불륜을 꺼질 듯 말듯한 목소리로 어렵게 시인했다.

— 레위니옹 섬에 출장 갔을 때 나와 같은 호텔에서 묵었던 여자야. 알게 된지 6개월쯤 되는데 처음 몇 달은 아무 일도 없었어. 낭트와 멀지 않은  렌느라는 도시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야. 그녀는 휴가차 그 섬에 왔었는데 각자 육지로 돌아와서 다시 연락을 하게 되어 불이 붙은 거야.

이미 확신을 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졌다. 질투보다는 배신감이 앞섰다. 그토록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그였기에, 그에 대한 내 사랑이 비록 그의 것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를 향한 내 신뢰만큼은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그 배신감은 배가했다. 배신감에 이어 그 없이 프랑스에서 살아갈 내 앞날에 대한 아득한 절망감이 덮쳐왔다. 그날 밤은 내게 닥친 이 불행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져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에게 화를 내거나 고함조차 지르고 싶지 않았다. 

배신감과 내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아침이 되어서야 지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왔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대학 강단에 서고 싶은 내 꿈을 접고 한국의 내 부모 형제와 한때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프랑스에 남기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은 오직 그의 사랑과 딸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더욱 북받쳐 올랐다. 그때 당시만 해도 번역가로서의 내 직업적 진로는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였고, 그의 사랑이 떠난 프랑스에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솟구쳤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아직 중학생이고 미성년자인 딸이 있었다. 또한 내 나이 45세에 한국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라는 걱정도 앞섰다. 나이의 중요성을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달랑 박사학위 하나와 발표한 논문 겨우 두세 편을 가지고 과연 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드니 이래저래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남편도 나름대로 나에 대한 죄책감과 새 여자에 대한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날 아침에 그는 내게 작은 쪽지 편지를 보내왔다.

«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했어. 나는 결코 당신이 싫어서 다른 여자를 만난 것이 아니야. 그냥 사랑이 내게 다가왔을 뿐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남자야.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쪽지 편지는 그의 감정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가 나와의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로부터 약 3개월 동안 나는 혼자서 고민하고 아파했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러려고 했어도 눈물부터 앞을 가려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시장을 봐오면서도 앞으로 맛있는 해물을 더 이상 함께 나누는 기쁨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쏟아졌다. 다른 건 몰라도 남편과 나는 음식에 대한 취향 하나는 너무도 잘 맞아서 이것이 초창기에 우리들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이 되는 대신 남편과의 즐거웠던 순간들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면 어김없이 눈물로 변했다. 남편의 전화를 받아도, 어떤 땐 남편의 얼굴만 봐도 목이 잠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원망이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깨어짐에 대한 깊은 슬픔이었다. 처음에 느낀 그에 대한 배신감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당시의 내 마음은 한마디로 전쟁 이후의 황폐하고 초토화된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리에 있는 한인 명상센터에도 다녀보았지만 나와는 잘 맞지 않은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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