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 Sep 03. 2021

사랑이라 부르기

관상용 고양이의 탄생

2019년 7월 즈음, 회사에서 고양이 입양을 추진했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풀이 우리 집에 들어온 시기와 거의 맞물리는 상황이었다. 5월에 회사 직원 한 분이 작은 아기 고양이를 데려 왔었다. 상자에 담겨 버려졌던 작은 고양이. 이제 막 파란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뒤뚱뒤뚱 걷는 아이. 손바닥 위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몸집의 아이. 처음에 갈 곳이 없어 회사에서 돌보았다. 결국 구조자의 집으로 들어가 어엿한 셋째가 되긴 했지만. 이후에 그 아이는 선례가 되었다. 넓은 공간, 동물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들여 더불어 살아도 좋을 것이라는 희망. 처음의 취지는 긍정적이고 올바른 듯 보였다. 갈 곳이 없는 고양이를 입양해 회사에서 모두 함께 돌보자는 건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입양처가 간절한 아이들은 차고 넘치니까. 비록 가정집이 아닌 사무실이지만, 다수의 사랑이 풍족하게 전달되면 아이가 행복할 줄 알았다. 그건 철저히 인간의 비약이자 오류였다. 고양이의 성격과 공간, 함께 지내는 사람들의 특성이 마법같이 맞물려야 비로소 천국이 완성되는 거였다. 입양 신청서까지 작성해가며 데려온 아이에게 이곳은 지옥이었던 거고. 약 5개월가량, 아이는 적응하지 못했고 손도 타지 못했다. 본래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데려온 건 죄책감이나 책임감 그 어드메의 감정 중 하나였다.


회사에서 처음 만난 아이의 이름은 ‘범’이었다. 구조자이자 임보자가 부르던 이름. 아이는 임보자 직장 근처 창고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누군가 자그마한 어미를 입양하고 싶다 하여 아이들을 모두 구조하고 입양처를 구하는 중이었다고. 젖소 무늬의 아이들 틈에서 범이는 유일한 고등어 무늬를 갖고 있었다. 입양 전 받은 사진 속 아이는 이제 막 잠에서 깨 어리둥절한 표정의 얄쌍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형제들과 어우러져 지낸 환경 탓에 사람을 무서워하고 같은 동족에게는 거부감이 일절 없었다. 그런 녀석이 많은 사람들과 섞여 지내려니 얼마나 괴로웠을지. 결국 8월에 풀이 입양을 결정하고 난 뒤, 12월에 범이를 집에 데려왔다. 그 당시에는 등을 떠밀려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손이 타지 않은 아이를 선뜻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으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우리가, 그 책임을 온전히 지는 거라고.  

입양 전 받았던 어린 택이 사진

어느새 외자로 이름을 짓는 게 관행과도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민망하게. 아이의 이름은 ‘택’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에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그냥 그 애 얼굴이 잘생겨서, 때마침 잘생긴 배우 중에 박보검이 생각나서, 그가 맡았던 배역 중에 택이라는 외자 이름의 캐릭터가 불현듯 떠올랐던 것뿐. 무의식의 가벼운 생각들이 연쇄되고, 도달한 끝에 그 이름이 뿅 나타난 것이다. 본래 끼워 맞추는 게 완벽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 누군가 아이의 이름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澤이라 답하겠다.


집에서 합사를 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는 격리 과정을 거쳐야 했다. 침대가 있던 방의 매트리스를 거실로 옮기고 나와 삼월, 솔과 풀 모두 거실에서 지냈다. 그다음에는 문 틈을 조금 열어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고, 그 후에는 냄새를, 모습을 익히고 문 개방 시간을 조금씩 늘리는 것으로 점차 아이의 생활 반경을 넓혀갔다. 예상보다 아이의 적응이 빨랐다. 오히려 어리둥절한 낯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건 기존에 집을 지키고 있던 두 녀석들이었다. 먼저 다가서 뺨을 비비는 건 택이었다. 더 이상 큰 신경전이나 다툼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우리는 아이들의 짐을 하나로 합쳤다. 비로소 인간들이 사용하는 침대는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아이의 목청이었다. 택이는 점잖은 얼굴과 달리 말이 많았다. 앞으로 가족이 될 아이들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새벽 내내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노래를 하며 뛰어다녔다. 마당이 있는 집, 단독 건물이었다면 허허실실 웃으며 넘겼을 일이건만 나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이웃에게 민폐가 되기 싫었다. 거기다 우리와 생활 습관이 맞춰져 밤이면 잠을 자는 솔과 풀을 깨우고 장난을 거는 게 거슬렸다. 해맑은 아이가 마냥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는 나 자신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맑고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거실을 울리는 어느 새벽이면 짜증스레 일어나 화를 눌러 참기 바빴다. 그러다가도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그런 아이에게 불만을 품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다. 어떤 날은 그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짜증이 솟구쳐서 눈물을 흘렸던 날도 있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이를 미워하느냐고. 아니.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 손에 닿지 않아도, 눈에 담기만 해도 벅찰 정도로. 우리가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도망치던 택이는 자기가 내킬 때 다가와 만져달라 소리를 낼 만큼 발전했다. 주말 오후, 낮잠을 자고 있으면 몰래 다가와 몸을 붙였다 가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는 거다. 인간인 나도, 고양이인 택이도. 아주 느리지만 서서히. 아이는 자신만의 속도로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 우리는 그저 천천히, 보채지 않고 기다려주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택이는 우리 집에서 다정을 담당하고 있다. 솔과 풀이 다투면 중간을 막아서 중재를 하기도 하고, 그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 아주 매끄럽게 화해를 종용하고 중립을 지킨다. 솔에겐 애교 있는 동생으로, 풀에겐 장난기 많은 형제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했다. 사랑이 많은 아이다.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한 아이. 사랑을 받는 것에는 아직 인색한 아이. 순간 들끓는 사랑보다 조금씩 예열되는 애정을 주고 싶다. 그럼에도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아직도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없다는 것. 발톱을 깎거나 치아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손을 대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화를 내거나 비명 비슷하게 소리를 내지르는 아이가 걱정돼 다가서지 못할 때가 많다. 마냥 방목할 수 없는 인간들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싶다가도 금방 체념한다. 아마 어렵겠지. 대화로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택이 앞에 캣닢 차를 한잔 두고 마주 앉았을 테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집에서는 인간인 나와 고양이인 택이의 어색한 눈빛 교환이 이어지고 있다. 뾰족한 발톱에 스크래쳐들은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하루가 다르게 너덜너덜해진다. 상관없다. 아프지만 마라. 기꺼이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지 않을 거라면 쫓고 쫓기는 전쟁이 시작되지 않도록 건강해야 한다. 지금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다.   

현재의 택.




이전 02화 운명의 냄새란 뭘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