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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Apr 16. 2023

대학친구 모임, 엄친아 시작인 건가


어느 강사도 무리한 동작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늘 자신의 몸이 가능한 범위까지만 움직이면 된다고 했다. 자신의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동작만 하라는 말은 언뜻 듣기에는 친절한 배려가 담긴 말 같지만 제 몸의 가동범위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을 던져놓고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막연한 말 같기도 했다. 가능한 범위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아는 일이었다.  


운동을 하며 매번 느끼는 것은 그동안 내가 늘 쓰던 근육만을, 그것도 편한 방향으로만 써왔다는 것이다. 늘 하던 익숙한 방식으로만 움직이며 살아온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필라테스의 동작은 그저 내가 일상적으로 하던 동작에서 조금 비틀었을 뿐임에도 심한 자극이 느껴졌다. 아프지만 시원한 자극. 아파서 그만하고 싶지만 시원해서 그만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 그런 통증 아닌 통증을 견디며 몸의 기운을 여닫곤 했다.  


섣불리 덤비던 초기에는 욕심만 앞서 무작정 최대치의 힘을 썼다. 그런 탓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무릎이 제 멋대로 픽픽 꺾이기도 했고 다음날까지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유난히 고통스러운 동작, 몸의 균형이 비틀어지는 동작, 나를 자극하는 동작,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점점 알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내 몸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그중 그나마 수월한 수업이 있었는데 몸의 윤곽을 고려해 제작된 젠링을 이용한 수업이었다. 젠링을 종아리에 끼운 채 동작을 하기도 하고 손에 잡고 스트레칭의 범위를 확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목이나 등, 허리, 허벅지 아래에 두고 누르는 힘으로 마사지를 하기도 했다. 가만히 누운 자세로 몸의 구석구석을 자극하는 시간이었다. 목 아래에 젠링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보면 유독 고통스러운 지점이 있다. 그곳이 바로 나의 자극점이다. 자신에게 자극이 되는 부위에서 멈추고 힘을 줘 누르면서 더 큰 자극으로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다. 자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정면 승부를 하는 셈이다.




단톡방 알림이 운다. 대학친구의 모친상을 알리는 글이다. 그 끝에 보이던 7이라는 숫자가 금세 사라졌다. 그 단톡방에는 대학의 같은 과 여자동기들이 속해있다. 그리고 그중엔 K도 있다. K는 나와 고등학교에서 만나 대학까지 같은 과에 와서 4년을 붙어 지낸 친구이다. 발인일까지는 이틀의 시간이 있었는데 우린 1일 차에 다 같이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동기들은 조퇴를 해서라도 달려온다고 했다.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앞서 너무 부끄럽지만 나는 나의 흰머리가 먼저 생각이 났다. 지금은 미모 비수기로 당장 나갈 일이 없어 염색을 잠시 미뤄두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거울을 내려 볼 때마다 한 가닥씩 늘어나는 것이 너무 신경 쓰였지만 쉬고 있으니 염색 비용이라도 아껴보자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기치 않게 나갈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나의 일 년 치 삶을 잠깐 마주하는 행색으로 대변해야 하는 만남 말이다.    


기초 화장품으로 뭘 쓰냐던 직장 선배의 질문엔 전 끈적이는 느낌이 싫어 잘 안 발라요 라는 철없는 멘트를 날렸고, 흰머리가 몇 가닥 나기 시작하는 선배를 보고는 비열하게 웃으며 놀렸었다. 그렇게 젊음에 방심하던 어느 날. 노화는 한 번에 찾아왔다. 피부가 급격하게 탄력을 잃고 몇 가닥이던 흰머리가 우후죽순 늘어난 것이다. 급기야 나는 모친상을 당한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기 전에 당장 동기들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런 몰골로 가야 하는 내 사정이 더 급해진 것이다.


급하게 검색한 결과 새치 커버 스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곧장 가게로 달려가봤지만 마침 그 제품은 없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데 갑자기 현실감각이 돌아온다. 옛 친구들 만나며 흰머리 좀 보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남들 눈이 뭐라고.  


요즘 나는 쓰지 않던 근육을 쓰는 것처럼 그간 애써 보지 않았던 나에 대해 알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나는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쓰느라 늘 피곤했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에도 괜한 에너지가 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일의 대부분이 대체로 한없이 하찮고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단톡방 친구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모임을 하는 사이라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이긴 하나 나는 그간 휴직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그 일을 말하면 아들이 학교를 가지 못했던 사연이 연이어 나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K는 제일 말해야 할 친구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제일 말하기 싫은 친구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우리는 가장 친하면서도 서로가 비교되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너무 순탄한 길을 가고 있을 K의 아들 이야기를 화답으로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친한 사이임에도 나의 깊은 고민을 공유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막상 털어놓기에는 어쭙잖은 자존심이 걸림돌이 되어 끝내 망설여졌다. K에게만 기회가 있을 때 이야기 해볼까 틈을 보던 사이 K는 아이들의 키가 훌쩍 컸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고만고만하던 우리 사이에 키는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첫째는 타고난 먹성 덕에 훤칠하게 자랐고, 둘째는 성장 주사 덕에 예상키를 훌쩍 넘겨 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무난하게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는 K의 아이들. 범생이 같이 엄마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춘기로 인한 어려움을 전혀 모르겠다며 웃음을 짓는 K 앞에서 하려던 말은 쏙 들어가고 괜한 질투심이 일었다.


학교를 제대로 가는 문제로 1년여간 근심해야 했던 아들, 모두가 장신인 시댁을 피해 하필이면 외탁하여 어릴 때부터 줄곧 작았던 아들, 학원을 죄다 관두고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딸, 아침에 세수하고 저녁에 양치하는 기본적인 생활습관마저 수만 번 목이 터져라 외쳐야 하는 아이들, 수업이 하기 싫다는 이유로 집에 온 과외 선생님을 돌려보내 남 피해 주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모친의 성정에 수도 없이 오점을 남긴 아들,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픈 어미의 욕망을 가차 없이 꺾고 마는 학업 성취 능력. 그런 내 핏줄의 면면들이 오버랩되며 괜히 화가 났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자극점이었다. 평소 알지 못했지만 건드려지는 순간 고통이 밀려오는 그 지점이었다.


코로나로 그간 만나지 못했던 기간이 길었던 탓에 그곳이 장례식장임을 잊고 다들 너무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못내 마음 한 구석이 꽁해있던 나는 활짝 웃지도 못한 채 집에 돌아왔다. 공부까지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얼른 발길을 돌렸다. 역시 아이들이 크면서 자녀의 모습이 내 얼굴이 된다 하더니. 순수하게 만나던 우리도 이런 현실을 마주하는구나 싶었다.  


다음날이 되어도 줄곧 마음이 불편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잘 자라고 있는 친구 아이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본능에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도 큰 문제는 아니다. 결국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나, 남들의 시선이 중요했던 내가 문제였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데 남들의 평가와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 자극을 피할 것인가, 더 큰 자극으로 마음 근육을 풀어낼 것인가.


오후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용기 내 그간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연신 힘들었겠다, 너무 고생이었겠다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조심히 듣고 깊이 공감해 주는 친구 덕에 자존심을 앞세우느라 오래 망설였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말하고 나니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아직 알아가야 할 내 모습이 많다. 나의 한계를 알기 위해선 나를 아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외면하는 것보다는 정면승부 하는 방법이 자극을 이기는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늦게 깨닫는 중이다. 이제 편하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마음 근육도 종종 써볼 생각이다.



# 그림 출처 : 리포즈플라테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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