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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Apr 25. 2023

학교 안 가던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 사춘기 아드님의 수행비서


습 후 습 후

오늘 내가 내쉬는 것은 그냥 숨이 아니다. 밀렸던 한숨이다. 이곳처럼 공개된 장소임에도 당연한 수순인 듯 한숨을 내뱉을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나는 호흡에 섞어 한숨을 뱉어낸다.


오늘은 기다란 타원형의 폼롤러를 이용한 수업이다. 폼롤러를 눕혀 놓고 스르르 밖으로 밀어내면서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세로로 세워놓고 이를 지지대 삼아 스트레칭을 하기도 한다. 다른 소도구에 비해 폼롤러를 이용한 날은 유독 강사의 몸짓이 하나의 춤사위 같이 느껴진다. 특히 한 손은 세워진 폼 롤러 위에 가볍게 놓고 다른 한 손은 앞을 향해 쭉 뻗어내는 동시에 반대쪽 다리를 사선방향으로 뻗어내며 발등을 한껏 휘는 동작을 할 때는 마치 발레의 한 동작 같다. 몸을 이용해 무언가를 표현해 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넓게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지지하고 있는 것은 나머지 한쪽 다리뿐인데 다리를 뒤로 뻗었다 다시 돌아올 때의 반동이 있어도 강사의 몸은 크게 흔들림이 없다. 선을 그리며 뻗어낸 팔과 다리는 잘 빚어진 그릇의 표면처럼 적절한 기울기로 자연스럽게 휘어진다. 낮은 주황빛의 조명이 은은하게 드리워져 마치 달빛 아래 선 청초하고 고아한 자태의 여인 같다. 우아하다.


몸은 유연하게 휘어졌으나 딛고 선 중심은 탄탄하다. 보기엔 쉬워 보였는데 디딘 발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내가 취하는 것은 그녀의 우아한 몸짓과는 사뭇 다른 투박함이 응집된 몸부림이다. 결국 우아함을 위해서는 흩뿌려지는 팔다리의 유연한 움직임보다 바닥을 딛고 버틸 수 있는 탄탄한 중심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중심이 올곧게 지탱해 주어야 비로소 부수적인 몸짓이 가능하고 거기에 디테일이 더해지면 우아함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들은 시험기간이니 주 2회의 과외를 3회로 늘리겠다 했다. 물론 그것은 갑자기 학업에 대한 열의가 솟은 것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의지를 불태우겠다는 의미도 아님을 안다. 단지 시험기간이라 그만큼 더 불안해진 마음을 그런 표면적 행위를 통해 조금이나마 감소시키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나 역시 그 시간만큼 아들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긍정적 느낌을 얻을 수 있기에 기꺼이 그 비용을 치른다. 굳이 따져보자면 우리의 불안을 나눠 가지는 대가로 비용을 치르고 조금의 안도를 얻는 것이다.  


그 추가된 하루가 토요일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던 아들은 기침 때문에 오전 7시에 기상을 했다. 매일 아침 저를 깨우는 일 때문에 험난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배신감이 든다. 주말이면 이렇게 깨우지 않아도 잠이 깬다니. 그렇게 아침 일찍 시작한 컴퓨터 게임을 종일 했다. 그리고 저녁 6시 20분. 과외 선생님이 도착했다. 과외 선생님은 매번 10분 전 정확하게 도착한다. 착실하고 인내심이 많은 청년이다. 아이는 선생님이 도착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게임을 한다. 다 같이 참여하는 온라인 게임이라 중간에 일방적으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면 수업시간에 근접해서는 시작을 안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속이 탄다.


몇 번을 가서 얼른 수업을 하라며 복화술로 말을 한다. 알겠다며 금방 끝난다던 게임이 6시 50분이나 되어 끝이 난다. 그리고는 화장실행이다. 거기서 시간을 보낸다. 게임을 하던 즐거움에서 벗어나 수업을 하기 위해 전환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다.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또 독촉을 한다. 보통의 날이면 마음의 준비를 위해 이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수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7시 10분쯤 나오더니 오늘 수업을 안 하면 안 되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안다. 그것은 묻고 답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일이란 것을. 내가 무슨 수를 써도 그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벌써 이런 일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던 무수한 기억들과 현재의 감정이 결합되어 순간 혈압이 오른다. 나는 주말임에도 시간을 내 제법 먼 거리의 수업을 온 선생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아들은 오로지 지금 너무 하기 싫은 마음만이 앞선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라며, 선생님의 성의를 생각해 좀 참고 해보라고 끈질기게 설득을 해도 오늘만 안 하겠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되냐며 아들은 되려 묻는다. 충분히 복잡해야 할 문제가 아주 단편적이고 단순한 문제로 전락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의 말을 수용할 마음이 없는 아들과의 대화에 점점 언성이 높아진다. 주중 수업도 다른 날로 미루거나 취소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도 미리 취소를 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오늘 같이 선생님이 오셨는데 안 하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면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그렇게 힘들고 하기 싫으면 과외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해도 그럴 수는 없단다. 불안하니까. 학교에서는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대충 넘어가서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단다. 오늘 수업을 받지 않는다면 이제 더 이상 과외를 시켜줄 수 없다 으름장을 놓는 나의 목소리를 선생님은 밖에서 듣고 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싫다.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는 자꾸 나를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한다. 나는 내 잘못이 아닌 이유로 그런 불편한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싫다. 선생님께 오늘은 수업이 힘들 것 같다며 오늘치 수업료는 지불을 하겠다 했다. 이미 그런 일이 몇 번째라 그렇게라도 해야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두려워진 선생님은 미리 알려만 주면 괜찮으니 전혀 개의치 말고 말을 해달란다. 나는 나중엔 이 청년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 염려되어 이 과외를 그만두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적립된 미안함이 많아 돈을 주면서도 을이 된 지 오래다. 우리 집엔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아침엔 깨우는데만 40분이 걸린다. 좀처럼 잠이 깨지 않는다. 우아하게 아침을 시작하려 사뿐한 걸음으로 아이방에 갔다가 쉰 목소리에 미간주름이 팬 몰골로 나오게 된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복식호흡으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엉덩이고 등이고 나도 모르게 사랑의 손길이 닿을 때쯤 왜 화를 내며 깨우냐 볼멘소리를 하며 겨우 눈을 뜬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꼭 이렇게 최대치의 화를 내야만 일어나는 것인지. 그리고 아이는 머리를 감고, 말리고, 교복을 입는다. 교복을 꺼낼 때 달그락하며 옷걸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순간 조금 정신이 든다. 저것은 내가 지난 일 년간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소리였다. 교복을 입으러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귀를 곤두세우고 제발 옷을 집어드는 소리가 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래. 학교를 가는 것이 어디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그 사이 나는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아침까지 먹고 갈 시간이 없어 아침은 차에서 해결을 한다. 그 바쁜 와중에 부엌까지 행차하여 오늘 메뉴가 뭐냐고 친히 묻는다. 그러더니 오늘은 컵라면을 먹겠단다. 이 녀석아. 차에서 컵라면이 가당키나 하냐며 또 실랑이가 시작된다. 오늘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판단을 하자. 고집을 꺾을 것인가, 라면을 차에서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것인가. 어느새 나는 빈 박스를 찾고 있다. 네모난 박스 속에 넣고 먹으면 조금 새더라도 괜찮겠지.


앞서 나가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아이가 안 나온다. 열림 버튼을 누르고 나는 또 누군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아이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다. 대충 교복을 두른 아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가끔은 가방은 두고 몸만 나온다.) 그리고 그 옆에 라면 냄새가 폴폴 나는 박스를 든 내가 있다. 예전에 친정엄마가 아이의 비위를 다 맞출 때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애 버릇 나빠진다고 화를 냈었는데 이젠 그때 엄마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오히려 이해가 된다. 이 아이와 같이 지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순탄하게 무언가를 하기 위해 자꾸 이렇게 맞추게 된다. 차 안에서 아이는 너무 흡족한 표정으로 회장님 같이 앉아 모닝 라면을 흡입한다.  지각이다.


주말 사이 감기가 심해져 병원에 가기로 했기에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갔다. 병원에 갔는데 감기가 유행이어선지 보통때와 달리 대기자가 많았다. 이를 보더니 그냥 가잖다. 사람이 많아서 기다릴 수 없단다. 그냥 초기이면 그럴 수도 있다지만 아이의 감기는 지금 심한 기침과 콧물, 코막힘으로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서 못 기다리겠단다. 아니면 가까이 다른 병원으로 가자 했더니 거기는 가지 않겠단다. 이곳이 어려서부터 계속 가병원이라 다른 곳엔 거부감부터 든다. 새로운 시도가 항상 어렵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을 어렵게 만들 때마다 화가 불쑥 올라온다.


결국 다음날 감기는 더 심해졌다. 게임이 주된 일상이 된 아이에게 그 이외의 시간은 모두 헛된 시간이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고, 다른 병원 역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선뜻 시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병원은 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대기자가 얼마 없으며, 지금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시기임을 구구절절 설명한 후 겨우 진료를 받았다.


이렇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그냥 수월하게 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난관을 넘듯 힘들게 치른다. 하나도 그냥 쉽게 하는 일이 없다. 예상하는 레퍼토리를 벗어나 늘 변수를 만드는 아이 때문에 나는 매번 불편한 마음이 된다. 그렇게 어렵게 하나씩 무언가를 알아가고 깨달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이가 온 힘을 내 그나마 학교에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최대한 도우려 애쓸 수밖에 없다.


나는 우아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타이르는 엄마. 주변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단단한 엄마. 그런데 남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처음이 늘 어려운 아이에게 핏대를 올리며 설득하는 일들을 하며, 자신이 납득되어야만 움직이는 아이를 대하며 우아함은 버린 지 오래다. 우아함이란 것이 고요한 말투나 몸짓이라기보단 탄탄한 내면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사소한 일에도 번번이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마는 나는 이제 그저 엄마로 족하다. 내 아이라도 이해하는 엄마. 내 아이니까 이해하는 엄마.


렇게 중심을 잡는 시도를 여러 번 하다 보면 깊이와 향이 짙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느 날 연히 우아함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말고 살짝 감춘 채 살아야겠다.



# 사진 출처 : 리포즈필라테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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