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록스가 없으니 슬리퍼로 대신한다. 운동을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는 이로 보이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러함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차림이다. 그중 먼저 갖춰야 할 것은 단연 슬리퍼다. 진짜 있는 여자들은 백화점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가도 그 가졌음을 숨길 수 없듯이, 진정한 댄서들은 흐느적거리는 몸짓에서도 춤선이 드러나듯이 슬리퍼를 신었음에도 뿜어져 나오는 운동인의 아우라를 기대하며 터덜터덜 운동을 간다.
많은 시도 끝에 운동엔 근거리가 필수임을 깨달은 자가 편하고 익숙한 곳에 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에 슬리퍼만 한 것이 없다. 운동에 투자한 시간과 그에 비례한 익숙해짐을 단편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8시경. 슬리퍼를 끌고 어둑어둑한 사위를 가르며 길을 걷는다. 이 길은 한 때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무던히도 바라보았으나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나를 심란하게 했던 곳이다. 가을날 단풍잎이 수북했던 길. 나는 그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모습을 그대로 각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정성 들여 봤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평범한 길이지만 내겐 여전히 단풍잎이 쌓였던, 그리고 또다시 쌓일 길이다. 언젠가 단풍잎을 품을 어미 같은 몸이기에 너무 힘을 주어 밟지 않는다. 덕분에 걸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 길 옆엔 버스 정류장이 있다.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앉아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버스가 오는 방향만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버스에 오르면 잠시나마 바깥으로 흐르던 시선을 이내 거둔다. 그러곤 마음을 온전히 내었다가 금세 식어버린 사람의 표정을 짓곤 했다.
버스 안 그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걸음이 늘어지는 내가 있다. 내가 운동을 하는 데는 내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그 자체, 또는 그런 부류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이 큰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그런 부류'라 함은 꾸준하고 반복적이며 귀찮은 일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좀 더 나은 인간집단을 말한다. 사소한 것 하나를 하더라도 일단 미루고 보는, 글을 쓰기 위해 아침에 노트북을 곁에 가져다 놓고 종일 딴짓만 하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다음날을 기약하며 노트북을 제자리에 두고 오는, 지속적이고 끈기 있는 일에 취약하여 만족지연이 어려운, 마음에 들러붙은 나무늘보가 늘 행동을 가로막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런 부류'에 소속되었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그런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강한 동기가 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이 뭔가를 시도했을 때에는 그래도 조그마한 변화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줄어든 몸무게라든가 미묘한 라인의 변화라든가. 바닥만 보이면 엉덩이부터 들이밀던 내가 매일 걷기도 하고 필라테스도 하는데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이 정도의 노력을 했으면 내 몸도 나를 위해 뭔가 애써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서운하고도 지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유난히 처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수업을 갔다.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올 때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래서 오늘은 대충 시간을 때워야겠다는 심산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따라 강하게 조련하는 스타일의 강사 수업이다. 끝났다 싶어 숨을 돌리려면 마지막 세 번을 더 추가하고, 이제 마무리 동작인가 싶으면 다시 새로운 동작을 시작하며 자극했다. 다른 수업에 비해 유독 동작의 난이도도 높았다. 보통땐 송골송골 맺히던 땀이 줄줄 흐른다. 이내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들러붙는다. 아. 뻐근하고도 고통스러운 시원함.
오늘 내 곁엔 비쩍 마른 여성분이 자리 잡았다. 내가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눈을 꾹 감고 바들거릴 때 그녀 역시 여러 번 자세가 무너지기도 하고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묘한 동질감이 느껴져 오히려 힘이 났다. 이렇게 강도 높은 운동을 시킴에도 이 강사가 인기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제로라도 몸을 혹사하고 싶은 우리의 본능을 일깨운 것이리라. 스스로 하기는 싫고 어려운데 억지로 시키면 어떻게라도 해보겠다는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의지를 일으킨 것이다. 억지로라도 이렇게 한 시간을 버티고 나니 다행히 무언가 이루어 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오늘도 힘들지만 해냈다.
땀을 흘리고 돌아오는 길엔 유난히 싸늘함이 느껴진다. 슬리퍼에 드러난 맨발이 시리다. 나의 쓸데없는 과시욕 때문에 희생양이 된 발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발끝에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오래전 할머니방의 문풍지에 수를 놓던 나뭇가지의 그림자와 비슷했다. 걸을 때마다 일렁이며 물결을 만든다.
예전 우리 집의 문은 문풍지가 둘러진 격자무늬 문이었다. 외부의 자극을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얇고 여린 막이었지만 방 안에서 추위에 대적해 우리가 믿을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드는 찬 바람 때문에 이 문 안의 공간만이 내가 안온해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새하얗던 문풍지가 세월의 색을 입어가는 동안 문밖에 서서 이 안의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해 몸을 도사리고 있던 것들이 있었다. 특히 바람은 틈만 나면 문풍지의 멱살을 잡고 쉴 새 없이 흔들어대곤 했다. 그 끈질긴 두드림에도 문풍지는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문풍지가 제 곁을 내어준 이는 매일 밤 고요히 존재하던 나뭇가지였다. 인정 없고 무디기만 하던 마음이 오랜 구애 끝에 열린 날이 있었다.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문풍지에 새겨진 그림같이 떠오르던 날 그림자는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러곤 엑스레이를 찍듯 몸을 납작하게 눌러 붙이고 희부연 종이 사이로 그 안의 세상을 보기도 했다. 그저 쿰쿰한 할머니 이불 아래 코를 훌쩍이며 노닥거리는 아이들과 머리가 희끗한 노인의 정경이 전부였지만 그는 그 광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진심이었던 나뭇가지는 문풍지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한 번만이라도 바라보기 위해 매일 밤 손끝을 치켜들며 가지를 뻗었을 것이다. 마치 필라테스의 몸짓 같이. 뻐근하고도 고통스러운 시원함을 느끼며. 도통 속을 보여주지 않는 문풍지를 바라보며 외면하고픈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내 모습을 못 보고 사라진 들 어떠랴, 그 안의 세상이 무어라 그리 궁금할 일인가 여러 번 단념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시련을 견뎌내고 드디어 문풍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날. 벅차오름을 느끼며 한 번씩 몸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몇 날밤이었는지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무튼 지금 내가 운동을 해온 기간보다는 훨씬 길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내일도 생각 없이 가고 볼 일이다. 꾸준함만이 길이다.
# 사진 출처 : 리포즈필라테스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