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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Jun 13. 2023

힘 좀 빼고 가실게요


텅 빈 집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방마다 창문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그리고 대충 빨리 청소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린다.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이기에 많은 힘이 들지는 않는다. 모조리 수납하거나 구석으로 몰아넣거나 내 눈에 보이지 않도록 문을 닫아 은폐하는 방법을 쓰면 된다. 나는 집안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한때 즐겨 보던 살림 유튜브는 얼마 전 모두 구독 취소를 눌러버렸다. 살림이든, 요리든 너무 쉽게 뚝딱 해내는 그들을 경외심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괜한 좌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그런 영상을 보고 동기부여를 받기보다는 일찌감치 내 영역이 아님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이 편한 사람이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옷방을 지나치다가 문득 겨울옷 드라이클리닝을 아직 맡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랑이 겨울 옷 드라이클리닝을 좀 맡겨 달라고 했을 때 다른 옷들과 한꺼번에 맡기겠다며 일단 미뤘었고, 다시금 옷을 챙겨보려 했을 때는 너무 높은 곳에 걸려있어 신랑이 오면 좀 내려달라고 해야지 생각하다가 또 미뤄졌다. 매번 내일은 다시금 찾아왔고 그렇게 하루씩 매일 미루는 사이 여름이 와버린 것이다.


마른 옷을 개어 넣다가 옷장 칸막이에 차곡차곡 쌓인 채 기울어진 겨울옷이 시야에 들어온다. 겨울옷을 정리해서 넣고 여름옷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매일 했다. 그러다가 당장 여름옷이 필요할 때면 겨울 옷더미 아래 놓인 정리 박스의 덮개를 힘겹게 들어 올려 하나씩 꺼내 입었다. 여름옷을 한 번에 정리하는 일과 매번 무거운 박스 덮개를 들어 여름옷을 하나씩 꺼내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인가를 가늠하다 그냥 돌아 나온다. 하려면 죄다 꺼내서 제대로 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또한 아침부터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을 하며 침대 끝에 걸터앉는다. 햇살이 눈부시다.


일단 커피를 마신다. 오전에 밀크 커피를 연거푸 두 잔씩이나 마셨으면서 그럼에도 아침을 먹지 않았으니 그나마 몸은 가볍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고 노트북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충전기를 연결하면서 오늘은 배터리가 닳도록 기필코 무언가 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모순된 생각인가 또 생각한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일단 휴대폰을 보며 마음을 늘어뜨려본다. 네이버 카페글과 네이트 뉴스를 읽고 위버스에 들렀다가 유튜브로 내 최애의 영상을 찾아본다. 언제라도 글감이 떠오르면, 언제라도 쓰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면 당장 쓸 수 있도록 노트북을 바투 당겨놓는다. 가끔 시간을 너무 헛되이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 때면 나와 노트북 사이의 거리가 마치 글과 나 사이를 나타내는 형상물인 양 안심하고 만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영감을 찾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흔히 글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 한다. 글 쓰기가 습관이 되도록 끈기 있게 써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어떻게든 내 마음속에 잠재된 글을 일깨워 끌어내야 한다는 말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쉽지 않다. 무작정 붙들고 있는다고 해서 써지지가 않는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무언가가 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부여잡고 쓰게 되는데 그것을 만나기 위한 예열시간이 너무 길다. 어떤 생각이 갑작스럽게 떠올랐을 시점과 이를 적어낼 몸이 일으켜지는 시점 역시 꼭 일치하지는 않기에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때를 기다리기란 참 힘든 일이다. 남들에겐 쉬워 보이는 일이 내겐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빨래가 다 되었음을 알리는 슈베르트의 '송어'가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기계음이 더해져 조금 날카롭게 들리는 그 음악은 탈수된 세탁물을 금방 꺼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게 한다. 한껏 습하고 비틀어진 상태의 세탁물이 세탁조에 담겨 있는 상태는  유쾌하지 않기에 몸을 날려 세탁기로 달려간다. 하루 중 가장 날렵한 순간이다. 세탁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문득 엄마의 건강검진을 며칠째 예약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연이어 얼마 전 병원 진료를 다녀온 후 보험 청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엉킨 빨래더미를 빨래 바구니에 담으며 복직 준비를 위해 옷을 좀 사야 한다는 생각과 립스틱도 마침 떨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참, 수선 맡긴 팔찌도 찾지 못했다. 내가 지금 끄집어내는 생각들이 엉킨 빨래더미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팔찌를 찾기 위해 시내에 나가기엔 너무 더운 날씨가 아닌가 하며 오늘도 쉽게 단념을 한다. 대신 생각난 것들은 얼른 메모를 해 둔다. 일단 메모를 하는 것으로 당장의 내 부담감을 회피하고 약간의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언젠가 기한이 임박한 시점의 조급해진 나에게 그 일을 맡기고 잠시나마 그 생각에서 벗어난다.   


어느새 햇살이 베란다 가득 들어찼다. 햇살을 아낌없이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행복해진다. 멀리서 싱싱한 생선을 판매한다는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선거 유세보다 더 또렷하고 호소력 있게 들려온다. 생선의 종류와 신선도를 설명하기엔 너무 분명한 딕션과 고급진 억양이라 저런 곳에 소비되기엔 아까운 목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이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으며 쪼그라진 티셔츠를 펄럭 털어 널다가 잠깐 마음이 펼쳐지며 무언가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좀 씻어야 하지 않겠다며 그 마음을 누르고 샤워를 먼저 한다. 그런데 씻고 나니 그 잠깐의 동요했던 마음마저 말끔히 씻겨버렸다. 일단 조금 쉬자는 생각을 하다가 살큰 낮잠에 빠지기도 한다. 한껏 늘어진 오후를 보내고 나면 방안에 잠시 머물렀던 햇살 조각이 물러난다. 아들의 하굣길 픽업을 하고 저녁거리를 챙기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오후의 시간은 훨씬 빠르다.


음식이 최적의 맛과 향을 자랑하는 따끈한 시점에 식탁 앞에 착석하지 않는 아이들을 재촉하고, 제때 씻지 않고 제때 자지 않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된다. 내 옆에 아직 자리한 노트북을 보며 저 가벼운 커버를 여는 것이 어찌 이토록 무거운 일인가 생각하며 옆으로 밀어둔다. 오늘은 왠지 휴대폰으로도 글이 써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모로 누운 채 영상을 보다가 결국 잠이 들고 만다. 그러다 어느 날은 내가 글을 쓰는 이도 아니면서 끊임없이 쓰고자 하는 마음에 매여있는 내가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다음날 또 드라이클리닝을 맡기지 않은 겨울옷과 미처 꺼내지 못한 여름옷과 엄마의 건강검진과 보험 청구, 새로 사야 할 옷과 립스틱과 찾지 못한 팔찌를 생각하고 그 사이사이 또 글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만큼 게으른 자를 완벽하게 포장하는 말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게으르다고 하기에는 나름 마음속으로 분주히 보낸 시간이 있으니 이런 자를 변호하며 쓰는 최고의 달변이 아닌가 싶다. 뭐든 제대로 완벽하게 하고 싶은데 그러다 보니 실수 없이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지고 결국 그 마음을 회피하고자 일을 미루게 되는 일련의 행동 흐름을 가진 자를 말한다.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어서 결국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해낼 만큼 노력하기는 귀찮아 일단은 회피하고 미룸으로써 즉각적인 안도감을 얻는 사람을 말한다. 지극히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내게 최근 잘 써보겠다는 마음이 더해졌는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어쩌다 억지로 쓴 글은 또 너무 힘이 들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게으름의 늪에서도 꾸준히 운동을 했다는 것은 그나마 고무적인 일이다. 그 사이 매트 수업이 종료되었기에 이번엔 기구와 매트를 교차로 수강할 수 있는 수업을 신청했다. 요사이 부쩍 늘어난 신규 회원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내가 제법 능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자신감이 조금 더 난도 있는 기구 수업도 도전하게 만든 것이다.  


첫 기구 수업을 간 날. 의외로 놀라운 것은 밝은 조명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정적으로 움직이던 매트 수업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환한 조명 아래 굳건하게 자리한 대기구에 착석한 내가 마치 연이은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온 장수 같았다. 음지를 벗어나 드디어 빛을 본 장수같이 밝은 조명 아래 한껏 격양되어 손과 발을 치켜들었다. 레벨업이 된 자에게 장착된 약간의 우월감은 몸을 한껏 경직시켰기에 강사는 치솟은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가곤 했다.


첫날 수업은 리포머 수업이었다. 누운 채로 점핑보드를 딛고 트램펄린을 타듯 점핑하는 리드미컬한 운동이었다. 발을 통통 구르며 치솟는 역동적인 동작이 마음에 들었다. 동작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새로운 수업이었기에 열정적인 시선으로 강사의 손짓 발짓을 탐색했고, 주변의 숙련자들을 뒤쫓았고, 미숙함이 드러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힘들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 맞춰 동작하라던 기본을 잊고 무리를 했다. 그 결과 잔뜩 힘을 준 채 움직인 나의 근육들은 안락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우성을 쳤고 밤새 뭉친 근육을 풀어내느라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몸살 기운까지 겹쳐 며칠을 앓았다.


얼마간 운동도 가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했다. 뭐든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균열을 만들기 마련이다. 편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탈이 났다. 그렇게 무게를 얹고는 어느 것 하나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오늘은 그냥 쓰는 중이다. 그냥 좋아서 내 글에 나 홀로 웃어가며 가볍게 툭 뱉어내던 예전을 생각하며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적는 중이다. 그간 괜한 힘을 쓰느라 경직되고 잔뜩 굳었던 근육을 살살 풀어내는 중이다. 오늘만큼은 힘을 빼는데 힘을 쓰는 중이다.   



# 사진 출처 : 리포즈필라테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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