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insonata Oct 12. 2022

햇살 좋은 날

시(詩)와 삶

2022년 10월 11일 화요일


시(詩)를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경우가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랄라를 낳고 아이가 두 살 정도 될 때까지였다. 매일 새벽 6시부터 시작되는 육아 행군은 늘 마음은 앞서는데 체력이 따라오지 못해서 엇박자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랄라가 낮잠 자는 시간에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단 한 편의 시라도 읽고 싶어서 시집을 끌어안고 있던 내가 있었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엄마 역할이 서툴고 힘들었던 시절, 내 곁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준 시 덕분에 마음의 윤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다. 돌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풍화(風化)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겪었던 시기였다. 마음이 슬픔으로 부서지고 또 부서져 모래가 되어버린 나는 책을 읽을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도 내 곁을 지켜준 건 시집(詩集)이었다. 

 

배앓이를 하면 밥을 먹기 전에 미음을 먹으면서 속을 달래야 하듯, 마음앓이를 하던 나에게는 긴 문장을 읽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유순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체기가 내려가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조금만 읽어도 펑펑 울 수 있어서, 읽는 것보다 우는 것에 내 체력을 더 할애할 수 있어서 고맙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눈에 익어서 읽기 편한 시를 읽었다. 그렇게 서가에 있는 모든 시집과 재회를 하고 나서는 왠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은 시인의 작품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편 두 편 새로운 시를 찾아 읽다 보니 조금씩 모래밭에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방울 두 방울 모아놓은 수분을 어느 날에는 눈물로 모두 쏟아냈다. 김양수 화백의 <햇살 좋은 날>이라는 글을 만난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는 시를 핑계 삼아 몸 안에 고인 맑은 물을 모두 토해냈다.


                                                               <햇살 좋은 날>

                                                                                                                                

                                                                                                                                     김양수


올해 95세가 되신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요즘 급격히 기력이 쇠약해져 누워 계시는 시간이 많다.

이른 새벽 여명이 오기도 전에 들녘에 나가

저녁 어두컴컴해서야 집에 돌아오셨던 할머니.

눈 뜨면 일터요, 자식 걱정뿐이어서

마을에서는 강단 있기로 소문이 나셨던 할머니.


이제는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드는지 많은 시간 누워 지내신다.

때로는 창문 밖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

지나온 세월의 그리움을 찾고 계신 듯하다.

어쩌면 그 추억으로 살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머니는 자연의 사계 중 겨울을 맞고 계시는 게 아닐까.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며 주위를 정리하시는 것 같다.

이제 할머니의 모습에서 남은 거라곤

해맑은 미소와 따뜻한 눈빛뿐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던가.

있다면 부모님이 자식 사랑하는 마음 아닐까.


"세상에 보탬이 되는 훌륭한 인간이 되려고 애쓸 것 없다.

자기 자리에 충실하고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살아라.

자신에게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엄격하게,

남에는 봄바람처럼 화창하고 따스하게 대하라."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언제쯤이나 살게 될까.


창 밖에 봄이 와 꽃이 피어

새는 노래하고 벌들은 꿀을 따는데

할머니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 할머니에게도 봄 같은 청춘이 있었으련만......


귀하고 좋은 것 다 주셨던 할머니께 난 무엇을 드려야 하나.

햇살 좋은 날 할머니를 등에 업고

꽃들이 축제하는 꽃길을 산책이나 할까 한다.


봄이로구나.

얼씨구, 봄이로구나.

이전 08화 감정의 노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