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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Sep 23. 2023

지며리

차분하고 꾸준히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랄라는 다음 달이면 스물한 살이 된다. 그리고 내년 6월에는 대학을 졸업한다. 랄라에게 올 가을은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학기이며,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여름 학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랄라는 일주일 정도 쉬는 시간을 갖고 나서, 곧 인턴쉽과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직업 적성 검사 결과를 펼쳐봤고, 자기소개서 및 온라인 구직활동에 필요한 서류철을 따로 만들어 자료를 업데이트했다. 그 절차가 끝나자 본인의 적성/관심분야가 일치하는 기업과 비정부기구에 대한 정보를 차례대로 모았다. 마지막으로 내년 봄 대학 졸업을 앞둔 신입사원을 모집하거나 인턴쉽을 제공하는 곳을 선별해서 엑셀로 문서화했다. 몇 곳은 인연이 닿아 면접을 봤고, 최종적으로 Haitian Global Health Alliance의 인턴쉽을 수락했다.


인턴쉽에서 맡은 업무가 구체화되자, 랄라는 방대한 양의 미국 비정부기구의 자료를 훑어보고 아이티에서 의료 지원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책임자에게 보고했다. 2010년 아이티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우리 랄라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짧은 겨울 방학을 마치고 다시 등교했을 때, 아이티의 재해 소식을 들은 랄라는 교내 모금활동에 바로 참여했고, 우리에게도 아이티를 더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대학교 졸업을 앞둔 랄라가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아 아이티를 위한 자선 단체를 열심히 찾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인기척도 듣지 못하고 일에 열중해 있는 스무 살 랄라의 등 뒤로, 앞니 빠진 일곱 살 랄라의 웃는 얼굴이 피어올랐다.


그렇다고 방학 동안 랄라가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려 있었던 건 아니다. 랄라는 시간을 내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좋아하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봤다. 어떤 날은 엘리랑 루피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옥시토신을 재충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외선지수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달리기를 하거나 산책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거품 목욕을 즐겼고, 일본/한국/대만에서 만끽한 식도락 여행의 후유증으로 불어난 체중을 관리하기 위해 자연식품 다이어트도 꾸준히 이어갔다. 랄라가 집에 있는 동안, 우리는 함께 장을 보거나, 향초를 사러 가기도 했고, 즐겨 찾는 카페에서 맛있는 음료를 마셨다. 스톰이 출장중일 때는 랄라 친구가 놀러 와서 이틀 밤 묶고 갔으며, 바다가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 바람에 싣려 오는 파도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하안거 해제일에는 랄라와 단 둘이서 노을이 내려앉는 호숫가를 거닐었다.


랄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스톰과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동안 무탈하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고, 새로운 기회를 스스로 탐색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랄라가 대견하다. 나이 드는 우리를 생각해서 건강 정보 문자를 보내주는 랄라의 마음도 기특하다. 얼마 전 랄라가 추천한 드라마를 보다가, '지며리'라고 적힌 생소한 이름의 식당 간판을 보았다. 처음 보는 단어여서 바로 검색해 봤더니, '지며리'는 부사이며 그 뜻은 1. 차분하고 꾸준히 2. 차분하고 탐탁하게라고 한다. 의미를 알고 나니 참 좋은 우리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랄라가 앞으로도 '지며리'한 자세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나는 '지며리... 지며리...'를 마음속으로 되뇌며 드라마를 끝까지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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