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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Sep 30. 2023

약팽소선

若烹小鮮 

2023년 9월 29일 금요일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일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처음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아직 어릴 때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집에서 일을 시키지 않았고, 어느 정도 커서는 유학 생활을 시작해서 여름 방학에만 한국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는 외국에서 혼자 공부하느냐 고생했는데 한국에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잘 먹고 잘 쉬면서 재충전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런 가족의 배려 덕분에 나는 정말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다가 방학이 끝나면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해마다 '쉼'의 여름을 선물해 준 가족이 있었기에, 내가 다른 나라에서도 잘 적응하고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랄라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스톰이 한국 출장을 갈 때마다 동행했었다. 그때는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어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탁상달력을 펼쳐놓고 최대한 친정과 시댁에서 균등한 시간을 보내려고 일정을 조율했다. 우리 친정의 반대편에 위치한 시댁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시댁을 방문할 때는 서울 아침의 교통 체증을 피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오전 11시쯤에 시댁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머님과 차 한 잔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곧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그러면 어머님은 냉장고에 있는 맛있는 김치와 밑반찬을 꺼내 접시에 옮겨 담는 일과 미리 밑간을 해 놓은 고기나 생선을 굽는 일을 내게 부탁하셨다. 


시댁의 다용도실에는 어머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무거운 프라이팬이 하나 있는데, 나는 그 프라이팬에 생선을 여러 번 구운 경험이 있다. 생선을 굽는 임무를 처음 맡았던 날, 어머님께서는 작은 생선 몇 마리를 큰 프라이팬에 올려놓으시면서, 애벌로 구워 놨으니 적당하게 데우기만 하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 나는 그 사이 여러 번 생선 뒤집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님께서는 생선이 작을수록 여리고 보드라워서 뒤집을 때마다 살이 부서질 수 있으니, 가만히 놔두었다가 한 면이 다 데워진 것 같으면 그때 뒤집어서 다른 한 면도 데우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바로 어머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고, 생선을 요리할 때마다 그날의 햇살과 생선 굽는 냄새, 부엌창으로 들어오던 바람과 어머님이 내주셨던 물김치가 떠오른다. 


도덕경 60장은 '치대국 약팽소선 (治大國 若烹小鮮)'이라는 글로 시작한다.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조리듯이 하라"는 뜻인데, 나는 요즘 이 대목이 참 와닿는다. 지긋이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십여 년 전 작은 생선을 자꾸 뒤집으면 뭉그러진다는 이치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작은 것일수록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곁에서 잘 지켜봐야 한다. 생선이 얼마큼 익어가고 있는지 그 정도를 가늠하려면 가까이서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묘책은 없다. 가만히 살피다 보면 언제 불의 세기를 조절해야 하고, 언제 뒤집개를 사용해야 하는지 그 타이밍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다. 왕필도 이와 같이 말했다. "조급하면 해가 많고, 고요하면 온전하여지고 참되게 된다." 그 대상이 생선이건 사람이건 나라건 자주 들척거리면 고유성이 사라질 수 있음을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약팽소선'의 뜻을 글로만 머리에 새기지 않고 몸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어머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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