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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파트라는 로또

도곡아파트는 도곡렉슬이 되었지만....

by 프로성장러 김양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도곡동으로 이사했다. 1990년대였고, 정부 정책 상 강남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줄지어 들어서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아파트들이 왕창 들어서 활성화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동산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부모님은 이모와 삼촌들을 따라 마치 옆집으로 이사를 가듯 강남에 진입했다. 물론 당시의 강남은 지금의 강남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엄마, 삼촌, 이모 가족은 모두 조금씩 다른 시기에 도곡동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도곡 아파트를 구매했다. 하지만 모두 이 땅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나아 보이는 서울의 다른 곳으로 아무렇지 않게 터전을 옮겼다. 8학군, 목동학군지, 이런 말들이 생겨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삼촌들이 이사를 나가던 시기에 언니와 나는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고, 부모님은 삶의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실익이 별로 없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언니와 나는 이미 그 동네에서 학교도 잘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이 잘 다니는 학교를 이유 없이 옮기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부모님은 언니와 내가 자라면서 넓은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도곡동과 인접한 역삼동에 좀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도곡아파트"의 소유권만큼은 꼭 쥐고 계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곡아파트는 도곡렉슬이라는 도곡동의 상징적인 대단지 아파트로 탈바꿈했다. 이 소유권이 부모님에게는 부동산 재벌까지는 아니어도 어마무시한 부동산 수익을 선물처럼 안겨줬다. 맞벌이로 두 부부가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면서 대부분의 교육비를 아이들에게 투자한 우리 부모님같은 중산층 가정이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로또를 아파트로 거두어들인 셈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부동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도 그 중심에 놓인 셈이었다. 어느 누가 이걸 행운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도곡아파트는 한때 몇 천만 원이면 살 수 있는 10평 혹은 13평형대의 소규모 아파트였다. 부모님 역시 그 아파트를 1억 미만으로 구매하셨다. 재건축이 된 이후 얼마간 이 집에서 살다가 20억에 달하는 가격에 팔아치우고 대신 그 돈을 개포동 아파트에 투자하셨다. 물론 개포동 아파트 역시 지금처럼 오르기 전에 팔아 버리셨지만 부모님의 부동산 투자는 우연이든, 기회였든 나름 성공적이었다..... 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좋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부모님께는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다준 "도곡아파트" 혹은 "도곡렉슬"에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이 있다.

내가 자라는 내내 우리 가족에게 도곡동과 그 주변 일대는 일상이자 삶이었다. 학원가뿐 아니라 매봉산, 백화점, 골목 시장, 병원까지 모든 인프라를 유용하게 애용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동네가 그 정도의 인프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라는 행운도 누렸다.

병원도 웬만하면 강남 세브란스를 다녔다. (내가 더 어렸을 땐 영동 세브란스였다) 아빠는 흑색종암 치료도 강남 세브란스에서 받으셨고, 장례식도 그곳에서 치렀다. 병실에 누워 도곡렉슬을 바라보며 이 부동산을 너무 빨리 팔았던 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아빠, 우리 잘된 거에만 집중하자. 지금 행복한 거,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 이런 거 말이야"


나는 어떻게든 아빠의 시간을 현재로 옮기고 싶었지만 죽음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게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아빠는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고, 빨리 포기했거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미련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셨다. 도곡렉슬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도곡렉슬을 생각하면 아빠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물론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과 추억들도 함께. 아빠는 지금 내 나이 정도에 배드민턴 클럽에 열심히 나가셨는데 나도 그 시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을 따라 매봉산을 오르내렸다. 도곡아파트 단지에는 서예학원도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할아버지 선생님을 놀려먹으며 다녔고, 단지 안에 있던 미장원(?)에서는 귀도 뚫었다. 내가 늘 뛰어다녔던 동네와 구멍가게, 놀이터, 마트, 매봉산, 놀이터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우리는 도곡아파트에 살 때에도, 도곡아파트가 도곡렉슬로 바뀐 뒤에도 그 안에서 그다지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 이야기를 만들지는 못했다. 각자의 삶이 바빴고, 어느 순간에는 관심사마저 달라졌다. 대학 진학, 취업과 같은 큰 일을 마주할 때 같이 축하하고 기뻐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아빠와 나 사이의 무관심이 하나의 룰처럼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였을까?

나는 아빠가 어떤 순간에 행복한지 알려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 역시 나의 즐거움과 슬픔을 아빠와 공유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도곡렉슬을 보고 있으면 도곡아파트가 그립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빠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안타깝게 다가와 슬프기도 하다. 아빠도 그립고 나의 어린 시절도 그립다. 나도 한 때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웃긴 사람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역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더 많은 돈으로 삶의 질이나 행복 강도를 높일 수 없다는 것도 이렇게 다시금 깨닫는다.


이제 아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도곡아파트 역시 도곡렉슬로 탈바꿈을 하고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빠는 이 세상에 없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도곡동의 추억도 온전한건 강남 세브란스 뿐인 것 같다. 이름은 바꼈지만 그나마 옛날과 가장 비슷하다. 그래서 아빠의 마지막 가는 길의 장례식도 허름하고 작긴 하지만 이 곳으로 정했다.


나는 부동산에 있어서는 어떤 아쉬움도 없지만 아빠와 다정한 부녀 사이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영원한 슬픔으로 남을 것 같다. 이제 나는 우리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아빠를 떠올리면 그리움과 함께 늘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잘하는 일뿐이다.

내 아이가 나뿐 아니라 아빠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

매 순간이 행복할 순 없어도 마음의 안정과 휴식이 되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

엄마의 지금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일,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엄마와의 이별 역시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지 모른다)


나는 아빠의 죽음이후 아빠를 추억하고 후회하면서 이렇게 또 삶의 교훈을 얻었다.


아빠, 나 잘 살고 있는 거겠죠?

아빠가 없어도 이 세상의 시간은 잘만 흘러가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슬픔과 후회도 조금씩 그 크기가 줄어들거라고 믿어요.


그래도 아직까진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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