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가족의 세상
우리 부모님은 대가족의 시대를 살았다. 아빠는 5남매, 엄마는 8남매였다. 더 놀라운 건 우리 부모님 시대에 더 많은 형제, 자매를 둔 가정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가정의 풍경이다. 농업 기반의 대가족 사회에서는 힘이 센 남자가 대우를 받았고, 특히 장남은 집안의 기둥이자 대들보이자 모든 것이었다. 장차 부모님의 재산을 다 물려받는 혜택과 함께,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자동으로 부여됐다. 핵가족이 일반적이고, 1-4인 가족이 일상인 요즘 세상에서는 매우 낯선 일이기도 하다.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변하고, 장자 우선과 남아선호사상이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면서 이 무시무시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들이 나타났다. 우리 아빠의 형제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아빠는 누나들과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고, 큰형과는 열 살 터울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큰형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도맡았다..... 고 들었다. 아무리 집안의 장남이라 해도 20대에 모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은 꽤나 큰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둘째 큰아빠는 일찍이 독립해 큰아빠의 그늘에서 완전하게 벗어났지만 미성년자였던 우리 아빠는 그런 자유가 없었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제공해 주는 따스함이 계속해서 아빠의 발목을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할머니, 큰아빠, 고모 식구들과 같이 자랐고,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고모의 아들들과 친하게 어울려 지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아빠와 자주 왕래하며 지낸 고모의 아들들이 더 친근하고 가족처럼 느껴진다. 아빠가 아플 때에도 그랬고, 돌아가셨을 때까지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줘서 너무 고마웠다.
아빠는 서른두 살에 엄마와 결혼하기 전까지 큰아빠를 위해 무상으로 일을 해주면서 그 대가로 집과 음식을 제공받은 게 전부였다. 결혼한 이후에도 아빠를 노예처럼 부려먹으면서 엄마까지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큰아빠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고, 경제적인 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건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새롭게 가정을 꾸린 성인 남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자식을 낳고 알아서 살겠다는데 이걸 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장남이니까 처자식이 있어도 네가 버는 돈은 다 내 것’이라는 말을 어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1970년대나 80년대까지는(?)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아빠는 가정을 꾸리고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면서도 원가정에 대한 도리는 지키고 싶어 했다.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며 사는 고모 가족들의 생활비를 지원해 줬고, 큰아빠가 큰엄마와 따로 살면서 갈등이 고조에 달하자 할머니도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나는 매일같이 “니가 고추를 달고 나왔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는 할머니가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할머니가 싫진 않았다. 물론 내 방이 사라진 건 슬펐지만 그래도 할머니방을 자주 드나들며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린아이들은 그런 법이다. 내가 남자이길 바라는 할머니여도, 우리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큰아빠라 해도, 아이들은 가족을 좋아한다. 큰아빠네 집에만 가면 고성이 오갔지만 그래도 친척 언니,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 명절이 좋았다. 물론 그 시절, 그 만남도 오래가진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였을까? 엄마, 아빠는 명절 때마다 둘째 큰아빠 가족들만 겨우 만났고, 우리가 더 자란 이후에는 그런 왕래조차 거의 없어졌다.
나는 아빠가 원가정에서 큰아빠와의 사이에서 겪은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그저 방관자 시점으로 지켜본 것에 불과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가족 갈등에 대해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나 역시 그저 어른들의 세계는 그런가보다, 라는 생각만 했다.
가족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으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도 훌쩍 자라 성인이 된 이후였다.
큰아빠는 눈앞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을 때조차 아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지만 내겐 그저 남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아빠는 중환자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면서도 큰형을 보고 싶어 했다. 엄마는 아빠의 마지막 길에 한이 되지 않도록 큰아빠에게 연락을 취했다. 큰아빠는 의식이 없는 막내 동생 앞에서 자신도 이제 늙어서 허리가 아프고, 무릎도 아파 병원에 다닌다는 하소연을 했다고 했다.
어떻게 죽음을 앞둔 동생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큰아빠는 그저 장자 우선 시대의 희생자일까?
아니면 공감 능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소시오패스인 걸까?
이런 형을 둔 아빠가 안타깝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큰아빠의 인생이 불쌍하다.
큰아빠는 그렇게 살면서 가족을 잃었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았다. 그 와중에도 계속 무엇인가를 잃고 있을 텐데 본인만 모르고 있다.
아빠 역시 큰아빠가 불쌍해서 놓지 못한 걸까?
그도 아니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한 형이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던 걸까?
아빠는 죽음 앞에서까지 큰형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뿌리친 건 큰아빠였다. 나는 부디 큰아빠가 아빠의 장례식장에는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큰아빠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물론 전혀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을 장례식장 앞에 앉아 왜 다들 자기한테 인사하러 오지 않는지 따져 물었다. 이런 행동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의 삶은 이렇게나 불쌍하고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언니, 오빠들은 큰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연을 끊고 산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아빠니까 슬프기는 할까?‘
아빠 장례식장에 와준 친척오빠와 언니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큰아빠의 관계 속에서도 나는 제3자였다. 친척 언니, 오빠들이 큰아빠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얼굴도 보지 않고 사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나도 알 길이 없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도 않다. 그저 다들 마음속에 상처가 있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엄마, 큰아빠는 시대의 부적응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걸까? 시대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산 것도 불쌍해..... 자식들도 다 아빠를 싫어해서 만나지도 않고..... 이게 뭐야....“
“뭐 그런 생각을 자꾸 해.... 이젠 그만 생각해“
“그냥..... 그렇다고..... 큰아빠도 불쌍해서......“
그렇다.
나 역시 자꾸 큰아빠를 떠올리며 이해해보고 싶은 걸 보면 아빠를 똑 닮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큰아빠와 같이 보낸 시간이나 추억도 없는데 계속 이런 생각을 한다.
아빠가 끝까지 형과의 관계에서 미련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척 언니와 오빠들이 큰아빠의 죽음 앞에서 부디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처럼 아빠를 인정하고 이해해 드릴걸, 하는 생각으로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아빠가 아빠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힘든 삶이었을 테니까.
동시에 평생을 가난한 마음으로 각박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큰아빠의 삶도 이해하고자 노력해 본다.
어쩌면 그게 우리 아빠를 위한 일이기도 할 테니까.
글을 쓸 때마다 그렇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아빠가 그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