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PSYCHE 05화
라이킷 2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PSYCHE - 5

현실은 상상보다 더 가혹했다.

by 김뇨롱 Mar 12. 2025
아폴론의 신탁을 기억하라. 그 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리라.
그 자는 너를 속이고 구슬려 너를 잡아먹을 속셈이니.
잘 드는 칼과 등잔을 준비해 그가 잠드는 틈을 타 불을 밝혀보아라.
소문대로 괴물이 맞다면 반드시 그 칼로 목을 도려내야 네가 살리라.


"원하신다면 바로 이번 주라도 준비는 가능합니다." 포어맨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꿈 속을 보고 오신다고 생각하세요. 저도 간단한 내용은 마이크에게서 들은 바 있기에 더 설명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저와 마이크 둘만 알고 있는 내용일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존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존의 모습을 마이크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원한다면 좀 더 시간을 들여서 고민해도 괜찮아."


"아니, 괜찮아." 존은 강경한 태도로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목이 잠겨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존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좋습니다..." 포어맨은 그에 대답하며 서류를 정리했다. "그럼, 이틀 뒤에 뵙도록 하죠. 마이크, 자네가 우리 센터로 와준다면 좋겠군."


"그렇게 하지. 그럼..." 마이크의 말을 기점으로 포어맨과 존, 마이크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어맨이 먼저 목례 비슷한 것을 하고선 사무실을 나섰을 때 마이크가 외투를 걸치는 존을 향해 말을 걸었다.


"괜찮은거지?"


"뭐가?"


"왠지 모르게 망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망설인다 해도 결국 나 혼자잖아." 존은 외투를 마저 걸치며 말했다. "내 꿈이야. 나만의 꿈이지. 내가 결정하면 그만인 문제니까."


"그래...그건 사실이지." 마이크는 왠지 울상이 되어서 말했다. "괜찮다면 오늘 술이라도 한 잔 할래?"


"아니." 존은 마이크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유난히 비죽이는 입술이 조금은 신경쓰였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볼까 하고." 존은 그 말을 던지고는 마이크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앞으로 이틀.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분이 들어 존은 연신 주먹을 쥐었다가 놓았다. 바츠를 나서면서, 베이커가로 들어서면서, 현관을 열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셜록이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이 꿈은 온전히 자신의 것. 이 미련도, 감정도, 고독도 슬픔도 오롯이 자신의 것. 현실의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는 차갑고, 놀라울 만큼 영민하지만 쉽게 관심을 흘리지 않고, 가끔은 지나칠 만큼 친절하며 이따금씩 혼란스러운 행동도 일삼는다.


딴에는 그런 자신을 생각해 본다.


고백하는 자신. 221B의 햇살 아래, 최대한 울지 않으려 애써가며 침착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자신을 떠올려 본다. 각자의 소파에 앉아서 혹은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타들어가는 화로를 바라보며, 혹은 머리가 든 냉장고에서 증거물을 꺼내거나 서로 밀크티를 들이키다가. 남자는 놀란다. 남자는 당황스러워한다. 놀라움은 이내 난처함으로, 곤란함으로 바뀌어 남자를 밀쳐내고 그대로 이끌고 사라져 끝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혹은 단칼에 베어내는 차가움으로 자신은 그럴 수 없노라 말한다. 녹아내릴듯이 비참한 심심한 위로의 말과 함께. 그 어떤 결과도 순탄하지 않았다. 모든 결론은 존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고 싶을 만큼의 모멸감을 맛보며 끝이 난다. 한 번에 털고 일어나서 도망가 버린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 그는 자신을 끔찍이도 잘 알고 있다. 홧김에도 뛰쳐 나갔던 전쟁터에서 의가사제대를 할 때까지 총을 휘두른 남자다. 그가 사랑하는 남자만큼이나 그 자신도 제정신은 아닌 사람이다. 끝끝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차라리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어질 것이고, 그는 기어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최악의 시나리오들은 셜록이 뒤에서 그를 불러세우며 일단락 되었다.


셜록은 그 이후로 존에 대해 파헤치는 것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스스로 자료를 모은다 해도 존에게 따로 오픈하지도, 말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서만 꺼내길 좋아했다. 마이크에 대한 이야기도 뚝 멈췄다. 혹시나 싶어 마이크에게 셜록의 연락이 오느냐고 물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하나도 없노라고 말하였다. 무슨 생각인 것일까. 물론 여느때처럼 오늘 아침에 살펴 본다던 가든의 수수께끼 비밀을 알아온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존은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애쓰며 자리에 앉았다. 최근에는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어려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존은 부러 받아든 차에 고개를 최대한 숙였다. 밀크티에 비친 셜록의 눈길이 자신에게 내리 꽂히는 게 느껴졌다.


"존."


"음?" 존은 애써 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당당하게 불러세운 것 치고는 셜록은 꽤 뜸을 들였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존은 자신이 먼저 말을 시작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타이밍도 여의치 않았다.


"이틀 뒤면 자네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 존은 그 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알게 되는 건 상관 없어. 다만 자네가 굳이 동행해주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셜록은 다시 뜸을 들였다. 왠지 모르게 지난 번 셜록이 낸 상처가 조금 따가웠다.


"자네가 걱정되어서 그래." 그 말에 존은 잠시 멈췄다. 셜록은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 스스로도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알아...자네가 마이크와 그렇고 그런..."


"내가 걱정된다고." 존은 내려둔 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쩌면...


"그래, 이상하지만." 셜록은 차를 들이키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그것 참 이상하군." 존은 자조하듯 대답했다.


"그 후로..." 셜록이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에 대해서 따로 캐보거나 하진 않았어."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어떻게 안 거야?"


"자네 재킷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접힌 팜플렛 모서리에 인쇄된 주소가 눈에 띄었거든." 빠르게 대답하며 셜록이 차를 들이켰다. "그것 말고는 없어. 때로 가장 좋은 추리는 그대로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거라서 나도 자네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지."


"자네답지 않군." 존은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 좁은 미간에 주름이 알 수 없이 걱정하는 표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피해자의 집에 침입하기 위해 곤란한 세입자 연기도 하던 남자다. 저런 것 하나 하나에 감정을 싣기 시작하면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자네가 이야기해준다면 동행하지 않을게. 약속하지." 셜록은 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소파에서 좀 더 몸을 빼내 그에게 더 다가왔다. 존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솔직하게?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서 차갑고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셜록과, 어둠 속의 연인이 겹쳐 지나갔다.


매일 밤 만나 애틋할 만큼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태어나 그 어느 순간에도 없었을 만큼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노라고?


아니, 존은 두 눈을 감았다. 원하던 대로 휘둘러 오던 삶이었지만 그도 삶에서 많은 것들을 단념 하며 살아왔다. 그는 기대하지 않고 겸손하게 포기하는 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해질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깊어지고 질주하는 마음 따위, 여기서 더 밀고 보여봤자 더 큰 상처만 입고 타오르며 재가 될 뿐이다. 특히나 이 알 수 없는 남자 앞에서는 더더욱.


자네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모든 고통과 운명을 겹쳐 만든 인연이라면 더는 자신이 없어.


"일단, 나는 마이크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그건 자네가 단단히 오해했어." 말을 듣는 셜록의 미간이 조금 펴진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그 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는걸까. 이상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얼굴이다.


"더 이상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존은 잔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셜록은 대답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답변이 더 이어지길 바라는 표정이다. 존은 자신의 마음 속에 쥔 돌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이 돌멩이를 그대로 셜록의 마음속에 던져놓으면 그 파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어떻게 퍼져나갈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가라앉아 영원히 침전할 수도, 저 멀리 자리 잡은 꽃까지 능선을 그려가며 도달할 수도 있다. 돌을 던진 후에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 돌이 어떻게 되느냐는 온전히 물이 받아주는 것에 달려있다.


"셜록." 존은 힘을 내서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블랙히스의 쓰리쿼터가 되어 출전했을 때, 런던대학의 의과대학에서 첫 실수에 매우 혼이 났을 때, 해리엇과 다시 볼 수 없을거라 여겨질 만큼 싸웠을 때, 네틀리에서 군의관 과정을 처음 밟을 때, 칸다하르 한 복판에서 총탄을 맞았을 때...그 어느 순간도 이 순간만큼 떨리지 않았다. 물론, 감정을 토해낸 적은 많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밀어내고, 상처 받을 각오를 하고 자신을 베어내듯이 감정을 말하려 하고 있다. 셜록의 표정은 하나 변한 게 없다.


"난 자네를 좋아하고 있어."


존이 던진 돌이 수면을 향해 능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셜록의 두 눈이 천천히 커진다.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자신의 찻잔에 담긴 차가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입은 옷이 무엇이었는지, 주변에 무엇이 있었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모든 게 선명하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흐려진다.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쉽지 않다.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의 얼굴이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까의 몹쓸 시나리오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그를 괴롭힐 준비를 한다. 그래, 처음은 당황으로, 놀라움으로 -


"역시...!"


나온 답변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존의 두눈이 커졌다. 셜록은 마시던 찻잔을 바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으레 하던대로 자신의 두 손을 겹친 채 자신의 코 앞으로 갖다댔다. "역시,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오, 이건 설마 설마 했거든. 몰리? 그녀는 눈에 다 나타나고 하나부터 열까지 티가 나지만. 오...아냐, 자네는 달라. 자네는 특별하지." 셜록이 한 손으로 잠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애에 대해 모른다며 비아냥대던 자네가 한 방 맞을 때가 온 것 같은데, 존. 안 그런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셜록을 보며 존은 한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존이 던진 돌은 끝없이 침전하며 붉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그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도 들어있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


"재미있군...언제부터였나? 얼마 전 자네를 조직에서 구해줬을 때? 혹은 사라와의 데이트에서 질렸을 때? 얼마 전 우리가 잠입을 했을 때부터인가? 오....아니면 첫 눈에 좋아하게 되었나?" 마치 실험체를 바라보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존을 바라보며 셜록이 물었다. 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자네는 대체..."


"방금 전에 나한테 이야기한 건 다 연기 였던 거야?"


"오, 알잖아. 내가 연기를 좀 하지. 부끄러워 하지 마, 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셜록은 손사래를 치며 말하였다. "자세히 이야기해주자면 자네 이전에 나와 하숙 했던 하트넛도 그랬지. 그 자는 나와 첫 사건을 수사하고 나서 그런 말들을 꺼내댔지만. 자네는 꽤 오래도 숨겨왔군. 그렇지?"


"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꺼낸걸까. 자신이 그간 소중히 간직해왔던 마음, 슬픔과 고통이 모두 별 것 아닌 것으로, 싸구려 감정들로 치환되는 것 같아 그는 견딜 수 없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고 싶을만큼.


"얼마 전에 자네 잠든 척을 하고 있더군. 물론 마이크와 함께 있던 때부터 알아챈 건 아니야. 자네가 그간 보내온 행동들이 어떤 시그널들을 보내고 있었지. 물론, 결정적인 건 그 거부하는 반응에 있었어. 마이크에게도 할 수 있는데 나한테만은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대체 뭘까? 생각보다 간단하지. 자네는 내게 감정이 있었던 거야."


"제발...닥쳐. 좀."


"내가 알아낸 것에 대해서 좀 더 좋은 반응을 해줄 줄 알았는데." 빠르게 말하다 말고 셜록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문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셜록이 금세 문 앞으로 다가와 그를 막아 섰다. 존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모두 게워내고 싶었다.


"비켜." 애써 셜록을 바라보며 존이 말하였다. 비참함과 서글픔이 어느덧 분노와 증오가 되어 그의 눈초리에 빛나고 있었다.


"내가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내게서 숨긴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정보일테니까." 셜록은 존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하였다. "자네는 좀 다를 줄 알았거든. 나와 같이 사건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일 줄 알았어."


"그래, 그것 참 미안하게 됐군."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존이 말하였다. "그러니까 이제 비켜, 빌어먹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마음이 아픈데." 셜록은 옆으로 비켜서며 비아냥댔다. "걱정마, 존. 우리는 '친구'잖아. 자네 마음을 알았다고 해서 자네를 내치지는 않을거야. 자네가 떠나가면 내가 알아서 찾아낼테니 걱정말고. 이번 일로 자네가 잘 이해했으면 좋겠군. 다시는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건 만들지 마. 생각보다 재미 없거든." 셜록의 말에 존은 그저 눈을 흘기고는 최대한 빠르게 221B를 나섰다. 놀란 허드슨 부인이 잠시 그를 잡는 것 같았지만 그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곳을 빠져나가, 자신만의 감정을 모두 토해내고 텅 비어버리고 싶었다. 그 어떤 시궁창이라도 지금 이 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빠르게 길가를 가로질러 베이커가를 벗어났고, 그나마 연락할 수 있는 연락처를 찾았다. 급하게 전화를 하려다 목소리가 울먹일 것 같아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마이크에게 문자로 볼 수 있는지 물었다. 마이크는 흔쾌히 자신의 사무실에서 보자고 답장을 주었다. 항상 그와 함께 질주했던 밤거리를 홀로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존은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 꿈 속의 연인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의 앞에서라면 미친듯이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은 자신만의 것. 고통도 고독도 슬픔도 자신만의 것. 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오롯이 꿈 속의 그 연인 뿐이다. 존은 애써 자신의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수요일 연재
이전 04화 PSYCHE - 4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