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깨어나면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느니 현실의 마음을 죽이는 것
허덕이는 숨 속에서 내민 오른 손에 금세 닿는 상대의 반듯한 이마, 그리고 얼굴의 굴곡을 따라 내려간 입술을 만지작 거린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상대는 그대로 존의 입술에 입술을 부딪혀온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짧고, 정중했던 그 입맞춤은 요근래 들어 더욱 깊어졌다. 입술로 사람을 잡아두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그러나 그 지분거림 사이에서도 존은 은연중에 그가 셜록의 얼굴에 주먹을 가격했던 때를 떠올렸다. 자신의 주먹에 부딪히던 그의 턱, 잠깐이지만 스쳤던 감촉, 벌어지는 상처...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다면 빌어먹게도 그 얼굴을 끝없이 쓰다듬고, 입맞추고 싶었다는 게 문제다. 그 생각이 겹쳐지면서 묘하게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상대의 입술 근처에 상처가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쇠냄새가 난 것도 같았다. 그 즈음에서 존은 잠깐 웃고 말았다. 주인보다 영리한 꿈은 그 날 하루에 있었던 기억들 마저도 이렇게 가져다 입혀 놓는 걸까. 자신이 바라기 때문에 상대는 점점 더 셜록처럼 되어 가는걸까. 아니면...
'허드슨 부인...'
갑자기 꿈 속에서 저 멀리 들려온 소리에 존은 슬쩍 정신이 들었다. 꽤나 늦은 시간에 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순간, 상대의 손놀림이 더 거칠어졌다. 마치 물 속으로 풍덩 빠지듯이 존이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들어왔다. 상대는 존이 다른 데 정신 팔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의 가슴께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 힘과 감각에 잠시 몸부림치던 존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허드슨 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짧게 대화를 나누고 이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꿈 속의 상대는 이제 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더 깊게 입맞추었다. 자신만을 봐달라는 듯이. 존도 그 입맞춤에 응하려는 찰나 -
분명 방금 전에 멈췄어야 했을 계단 삐걱이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온다. 더군다나 더 가까워져 온다.
(허드슨 부인, 왓슨 박사가 윗층을 쓸 겁니다.)
존은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꿈 속 연인과의 행위에 더 집중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자신을 끝없이 한계로 몰고 가는 상대의 손을 뿌리치고 끝끝내 존은 자신의 정신을 다잡아 눈을 뜰 수 있었다. 자신의 어두운 침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노란 불빛이 가는 선을 그리며 그의 침실을 직선으로 가르고 있다. 잔뜩 긴장한 자신의 신체가 그 선에 잘린듯이 가만히 멈춰만 있다. 이내 그 선은 어떤 그림자로 인해 일부가 지워졌다. 존은 지금 당장은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마이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까도 생각했었다. 물론 그 의견은 마이크가 한사코 반대하는 바람에 묵살되고 말았지만…
"존..."
방금 전 삐걱이던 계단 소리처럼 고통스러운 듯한 갈린 소리가 고매한 저음의 음성으로 새어나오듯 그의 침실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내 알 수 없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몇 분 정도 그 그림자는 노란 불빛을 침범한 채로, 그의 침실에 알 수 없는 공기를 흩뿌리다 사라졌다. 그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간 뒤에야 존은 두 눈을 뜰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 눈물 같은 게 터져나왔다. 아프간에서 총알이 스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꿈을 꿨던 날들처럼 참아내려 해도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그는 한껏 고개를 숙였다. 꿈 속의 연인은 오직 꿈 속에서...현실의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대화를 못 했다니 정말 유감이지만 이해는 가는군."
"자네가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지금 당장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존은 마이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그래, 그게 잘 된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마이크가 덧붙이듯 말했다. "하지만 나도 곤란하긴 해. 아무리 봐도 셜록이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그게 그렇게 중요하긴 할까." 존은 비소했다. 마이크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다시 이야기 해야 하잖아."
"그게 지금은 아닐 뿐이야."
"그래..." 마이크는 한숨 쉬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제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시는 곤란해."
"그래,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존은 마이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마이크는 잠시 자리로 가더니 서류를 하나 가져왔다. "자네가 심리상담가라고 하면 치를 떠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이건 국가에서 붙여주는 무료 상담사랑은 좀 다르니까."
"이게 뭐야?"
"자네가 치료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해결책을 좀 찾아봤지. 최면 상태는 꿈을 꾸는 상태와는 다르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았지."
"그러니까, 최면으로 내 꿈 속에 들어간다는 건가?"
"그런 거지." 마이크는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야. 셜록과의 관계라면 나도 끔찍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자네가 생각하는 관계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자네가 행적을 감춘다 한들 셜록이 자네를 찾아내는 건 시간 문제이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나에게 찾아왔던 그 처음의 의도대로 자네가 그 꿈을 꾸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적절하겠지."
존은 대답 없이 서류를 바라보았다. 치료센터 지부장이라는 남성은 영리한 눈빛을 한 흑인이었다. 옆에는 그의 이름이 고급스러운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에릭 포어맨]
"그런데 말이야..." 마이크가 존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질문 하는 거 참 바보같지만...."
"정말로 치료하고 싶은 게 맞는거지?"
그 말에 존은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에 갑자기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던 - 아니 그건 부러 존이 묻어둔 것이다 - 것들이 무수히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를 잡았던 셜록의 손. 바라보는 눈빛. 어제까지만 해도 마이크를 노려보던 눈빛, 그에 못지 않게 자신을 노려보던 그 눈빛, 수많은 문자들, 늦은 밤까지 늦은 그의 행방, 지난 밤 자신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 그림자까지...마음을 주게 되어버리면 끝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있지, 지금 우리가 하는 이것도 어느 정도는 치료의 일환이야. 자네도 느끼고 있겠지만." 마이크는 두 손을 펴보이며 말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아이스크림 먹는 것 처럼 가벼운 것 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야 뭐 언제든 자네가 필요하다면 들어주는 건 문제가 없다는 소리야. 그게 자네 마음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물론, 적어도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지."
"아니..." 존은 그 말에 피식 웃어보였다. "그건 차라리 고문이야. 내 꿈을 지우지 않는 한 내가 결국 그 곳을 떠나야 할 걸."
"이뤄질 수 없는 건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마이크가 마주보며 말했다. "자네 마음이 확고하다면 그걸로 괜찮겠지."
셜록의 마음 같은 거야 알 수 있을 리가, 꿈에서 깨어나면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느니 현실의 마음을 죽이는 게 차라리 나은 것.
"좋아." 존은 서류를 바라보며 쓰게 미소지었다. "치료 받아보고 싶군."
그를 바라보며 마이크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의 진행은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그 와중에 셜록이 존에게 슬금슬금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일 뒤였다. 처음에는 갑자기 날씨 이야기나, 갑작스레 몰리 이야기나 레스트라드 경감 이야기를 꺼내더니 존이 사건에 대한 걸 하나 물어오는대로 신이 나서 자신이 맡아온 사건들과 그 사건에 대한 그의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해대기 시작했다. 떠들어대는 셜록의 옆에 놓인 해골이 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자 존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빠져드는 마음과 자신. 꿈 속의 다정한 연인의 머리칼, 그 머리칼은 분명 검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분명 푸른 빛이고 그 섬세한 손길은 분명 기다랗다. 두터운 입술은 한껏 자신의 몸을 탐한다. 미련 없이 빠져드는 자신이 있다.
"존, 존! 듣고 있는거야?"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박수 소리에 존이 정신을 차렸다.
"존...?"
이내 셜록이 당황한 듯한 소리를 냈다. 존은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셜록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존이 놀라서 손을 떼내기도 전에 셜록이 빠르게 자신의 손을 존의 손에서 빼내었다. 그의 손톱이 날카로웠는지, 존의 뺨에 베인 상처가 나고 말았다. "괜찮아? 대체 왜 그러는거야?" 셜록의 냉랭한 태도에 존은 자신의 뺨을 감싸며 잠시 고개를 떨궜다.
"아, 아냐...자네도 놀랐겠군." 존은 자신의 소매로 잠시 뺨을 닦아냈다. 얇게 베인 상처일수록 시리고 따갑다.
"나는 마이크가 아니라고." 셜록의 말에 존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마이크가 말한대로 단단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존은 애써 웃어보였다. 그는 부러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 상처는 어디서 난 거야?" 사무실에 들어온 존을 바라보며 마이크가 물었다. "이번엔 내가 셜록에게 한 방 먹었거든." 존은 그렇게 일축하고는 자리에 앉아있는 닥터 포어맨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닥터 포어맨. 존 왓슨입니다."
"에릭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갑습니다, 왓슨 박사님." 그는 소탈하게 대답했다.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사내였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에릭은 앞으로 두 손을 모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충분히 고민거리가 될 정도의 이야기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의 꿈 속에서 어느 정도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야기 자체를 바꾸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궁금한 것들은 조금씩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오늘 바츠로 오시면서 보신 빨간 색의 물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찾아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을 그 상황 속에 다시 놓아두고 주변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도록 제가 불을 밝혀드리는 정도의 일이죠."
불을 밝힌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지만 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 몰린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어졌다. 꿈 속의 연인이라도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안아주었던 사람이 셜록이었노라고.
"좋습니다." 존은 대답했다. "이제는 저도 그 얼굴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