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드러난 꿈 속의 연인. 순수한 사랑은 의혹에 깃들 수 없거늘.
어리석은 내 연인이여, 순수한 사랑은 의혹에 깃들 수 없거늘. 어찌 이토록 나를 믿지 못하는가? 우리의 사랑은 한낱 촛불에 사그러져 없어졌고, 그대가 든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찢겨졌도다. 제피로스의 숨결로 그대를 데려오고 꽃으로 만든 시종으로 그대를 섬겼음에도……어찌하여 나의 사랑을 믿지 않았는가?
마이크와 존이 칼앤에릭 심리 센터에 도착할 때 즈음엔 이미 오후 1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포어맨은 문 앞에서부터 친절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고 으레 이런 최면 요법에 앞서 긴장도 풀 겸 작은 농담을 건네는 게 포어맨의 작은 관례같은 것이었지만 존의 표정을 보아서 그런 것은 바로 건너 뛰기로 했다.
“여기, 편하게 앉으시면 됩니다.” 포어맨이 가리킨 곳은 흔히들 접하는 심리 상담소의 긴 의자와 다를 게 없었지만 존이 앉자마자 포어맨이 저만치에서 어떤 기계를 끌고 와 그의 몸 여기저기에 붙였다.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최면 상태에서 큰 불안증세가 어디서 나타나는지 정도만 체크할 생각입니다.” 포어맨이 말했다.
포어맨은 천천히 최면 요법을 준비하였다. 마이크는 자연스레 그 근처의 주변 소파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마이크와 포어맨의 이야기였지만, 그들이 존을 이 먼 심리 센터까지 데려와 굳이 이 자리에서 최면 요법을 거는 건 어디까지나 그 '거리감'에 있었다. 그들은 존이 꿈 속의 연인의 정체가 무엇이건 깨닫게 되었을 때 당장에 뛰쳐나가 221B로 쳐들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숨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한 돌발상황을 예측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 둘 다 이 증상이 '병'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게 병이라면'
마이크는 존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럴리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애초에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한 기분이라면 몰라도 감정을 억제한 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결코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존은 감정에 취해서 눈치도 채지 못했겠지만 그건 마치 자신의 감정을 잘라내줬으면 좋겠다는 요청과 마찬가지였다. 마이크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마이크는 존이 자신의 증상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부터 깨달았다. 그가 셜록에 대해 지닌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그 끝을 함께 목도하는 건 셜록이 아닌 마이크 그 자신이다. 그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잠시 숙연해졌다.
"자, 이제 꿈 속으로 천천히 들어갈겁니다. 긴장을 풀고, 제가 소리를 내면 꿈 속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포어맨은 옆의 작은 기구를 이용해 은은한 소리를 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존이 조금 더 몸을 수그러트렸다. 누가 봐도 편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꿈 속에 들어왔습니까?" 포어맨이 묻자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의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이번에도 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평소처럼 그대로 꿈 속에 계시면 됩니다. 제가 소리를 내면 그 공간은 조금씩 밝아질 겁니다." 포어맨은 그 말과 함께 다시 기구를 이용해 은은한 소리를 냈다. 소리가 퍼져나가며, 존의 표정은 조금씩 달라졌다. 이번에 포어맨은 한 번만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3~4번에 걸쳐 소리를 냈다.
"뭔가 보이시나요?" 포어맨이 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존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손..."
따뜻하다. 그 손은 늘 따뜻했다. 투박하고 길었지만 늘 그 온도만큼은 그대로였다. 점점 드러나는 살갗, 그는 그 손을 잡아 위로 쓰다듬어 올라간다. 주변이 점점 더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에 존은 한 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현실에서 마주치지 못한 연인은 밤에서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 사랑은 이내 그의 가슴에 자리잡아 몹쓸 정도로 깊은 병이 되어버렸다. 가슴에 있던 것을 겨우 내밀어서 현실의 남자에게 내밀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야멸찬 조소 뿐이었다. 남은 것은 꿈 속의 연인 뿐. 그렇게...
그 눈은 분명 새파랗다.
아니, 그 눈은 진한 군청색이었다.
그 머리는 고불고불하게 말려 늘어서 있었다.
아니, 그 머리는 짧게 잘린 상태였다.
존은 두 손을 내밀어 남자의 얼굴을 잡아보았다.
그래, 너였구나.
존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포어맨이 아무리 물어보아도 존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마이크는 두 손을 맞잡고 존을 바라보았다. 이내 존은 거의 흐느끼다시피했고, 포어맨은 급하게 최면 요법을 종료했다. 마이크는 이내 존에게 다가가 그를 앉히며 부축했다. 알 수 없이 침울한 기운이 사무실 전반을 감돌고 돌았다. 포어맨은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존이 눈물을 닦으며 그를 제지했고, 자리를 비켜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포어맨이 나가고 난 뒤, 존은 마이크에게 뭔가를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이크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포어맨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걱정하지 마. 이제부터는 내가 존과 이야기하는 게 괜찮을 것 같아."
포어맨은 그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마이크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바로 돌아서서 자신의 차로 돌아왔다. 존은 옆자리에서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존." 마이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길은 트여있지만 마이크는 핸들을 잡은 손을 더 꽉 조였다.
"한 번만 본 걸로는 알 수 없을지도 몰라." 마이크의 말에 여전히 존은 대답이 없었다.
"괜찮다면 다음에라도..."
"제발, 마이크." 존은 두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다.
"그건..."
"그건 '나'였어." 존은 대답했다. 이제까지 그를 꿈 속에서 품어오고 사랑하고 입맞추고...그 어느 것보다 그에게 셜록에 대한 사랑을 깊이도 심어놓았던 사람. 그 남자. 존은 꿈 속에서 처음으로 빛을 받아 밝게 드러난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였구나...존은 조심스레 속삭였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메스꺼운 절망감이 다리 저변에서 밀어올라와 그의 머리를 장악한 순간, 존은 구토하듯 두 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남자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이다. 푸른 눈동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날 사랑한 건...나 자신 뿐이었던 거야."
그 감정과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은 오롯이 자신의 것. 그의 꿈 속에서 그를 쓰다듬어주던 남자는 그가 바라던 모든 것들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그에게 잠을 무기로 삼아 죽음으로 유혹해댔다. 마이크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밤은 매일 찾아오니까. 마이크가 전에 했던 말을 상기했다. 이토록 잔인한 고문이 역사적으로도 있었던가?
매일 밤마다 자신을 사랑하러 다가오는 남자가 자기 자신인 고문 말이다.
마이크는 머리를 써가며 존이 어떻게든 잠을 자지 않게 하거나, 혹은 잠에 들더라도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자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다. 물론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도, 존도 그 끝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언젠가 존은 잠들 것이고 그리고 언젠가 다시 자기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다시 어둠으로 가려진다 한들, 진실을 알게 된 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어둠이 아니라 의혹과 실망, 고통으로 가득 찬 절망일 뿐이다.
"여기서 내려줘." 존이 대뜸 말했다. 그 곳은 베이커가와 가깝지도, 그렇다고 성 바톨로뮤 병원과 가깝지도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생겨났으나, 존은 마이크가 서행하면서 어물쩡대는 사이 빠르게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이크는 당황해서 존을 향해 크게 외쳐댔지만 존은 금새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그 날 밤, 존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불안해진 마이크는 셜록을 찾아가려다 잠시 망설였다. 존이 그토록 싫어하는 상황을 자신이 야기시키는 것 같아 바로 그에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스코틀랜드 야드에 연락을 취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가 그를 찾아냈을 때 존은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존이 가장 바라마지 않던 사람이 없는 차가운 한복판에서, 마이크는 존을 부둥켜 잡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영원한 잠에 빠지다니, 그만큼 잔인한 말은 세상에 없을거라는 생각을 되뇌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