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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PSYCHE 08화

PSYCHE - EPILOGUE

이제 그는 답이 없다.

by 김뇨롱

처음 시작은 단순했다.


그 야비한 발자취가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난 뒤 한 8시간이나 지났을까. 전날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가져온 사건을 정리하느라 생각을 이어가던 중에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모든 걸 지난 밤으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존...?"


어리석기는, 존은 뛰쳐나갔잖아. 네가 한 말 때문에.

마음 속에 머물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힐난하듯이 내뱉었다. 셜록은 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생각은 금세 자신이 맡은 사건의 정리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궁전 안에는 방도 많고 통로도 많았기에 그가 원하는대로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셜록..."


아침에 영안실로 들어서려다 마주친 몰리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얼굴이나 옷차림 심지어는 그녀 입술에 슬쩍 올라와 있는 립스틱 자국과 소매에 묻은 커피 자국까지 눈에 들어왔지만 아까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원인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몰리는 참는 걸 잘 하지 못한다. 그녀는 조용히 셜록을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존이...'


그 뒤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겠지. 그 이후로 너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었으니까.

내가 미워서?

아니, 아니, 아니...

다시 마음 속에 있는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쉰 웃음을 흘려댄다.

그건 너도 알잖아.


너를 너무 사랑했으니까.


영안실로 가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셜록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베이커가 221B의 3층이었다. 그들의 플랫 위층. 작고 소담해서 딱 그와 걸맞은 '닫힌 책' 같은 의사양반이 혼자서 소박하게 지내던 방. 어째서 돌아온걸까. 셜록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 방 안으로 들어섰다. 궁금한 건 좀처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끼쳐오는 냄새. 향. 모양. 색깔. 분위기. 아늑함.

햇살이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감싸는 침대 시트. 이 침대를 본 적이 있다. 아니, 몇 번이라도 봤다. 심지어 존을 데려오기 전에는 자신이 여기서 몇 번이나 잠을 청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어느덧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낯설면서 그리운 기분이 들 수가 있나?


이상한 기분이 드려 할 때, 셜록은 늘 하던 대로 자신의 마음 속 궁전에서 아무 방이나 골라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가장 자주 들르는 방 말고 다른 방들은 굳게 잠겨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그 방들에는 암호도, 잠금 장치도 없었다. 그가 원하면 언제나 열린 채로 그를 기다렸다. 마치 누구처럼.


-


사건 의뢰인에게 왔던 문자,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온 문자와 이따금씩 형님의 문자.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을 거둬두고 허드슨 부인의 걱정도 뒤로 한 채 무심코 거리를 나섰다. 꼼짝없이 갇힌 채로 그는 현실에 돌아와야 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다시 베이커가로 돌아왔다가 다시 스코틀랜드 야드로 갔다가 하면서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존이 떠오르지 않는 곳은 없다고.


존이 머물렀던 방에 들렀을 때, 그는 그 상냥한 햇살과 모든 물건들이 미치도록 싫어졌다. 그걸 모두 버리고 나면 잊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아랫층에 존이 자주 앉던 소파 의자를 기어코 끌어내 윗층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문을 잠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마음 속 궁전에 있는 문들을 몇 번이고 다시 두드려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마치 누구처럼.


-


어느 순간에는 다시금 마음을 먹었다.

모든 걸 집어치우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길을 걸으면서 웃는 존

자신의 추리에 감탄하며 바라보는 존

다시 물어보는 존

바보같은 질문을 하는 존

같이 달려오며 숨이 차서 곤란해하던 존


길을 걸으면서 추리 대신에 존에 대한 데이터가 미칠듯이 쏟아내렸지만 셜록은 애써 그것들을 무시했다.

겨우 스코틀랜드 야드에 도착해서 레스트라드와 앤더슨, 샐리를 만났다. 늘 비아냥대던 샐리도 이번에는 잠잠했다. 레스트라드는 답지 않게 차를 마시자며 그를 빈 자리로 데리고 가더니 십여분 정도 삶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힘을 내라며 셜록의 등을 한 번 툭 쳤다. 코트가 툭 털리면서 어딘지 모르게 존이 닿았던 부분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는 셜록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피해자의 상태가 독특한 편이라 금방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장 주변을 바라보다 육군 마크가 있는 컵을 발견했다. '우리 때는 저거 하나 들고 올 수 있는 힘만 가지고 제대해도 다행이라고 말들했었지.' 문득 존이 던졌던 농담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애써 입 주변을 문질렀다.


'배고픈데, 어디 갈까?' 존이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 배가 고팠다. 대충 주변 음식점이라도 가볼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이내 존이 샌드위치를 가득 물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고, 셜록은 식사하는 걸 포기했다.


이상한 일은. 그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 궁전의 문을 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베이커가 221B번 3층의 굳게 잠궈둔 문을 열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제 쌓일대로 쌓인 먼지가 날려대서 숨도 쉬기 힘들테고

어떤 물건은 썩어서 온갖 냄새가 진동할테고

주인을 잃은 소파는 스프링도 망가진 채 그대로겠지


하지만 늘 그렇던 대로 그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해골 아래 숨겨뒀던 열쇠를 가져와 3층의 문을 열어본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꽤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이렇게 푸근하고, 아늑하고, 그윽하고, 슬프고, 애처롭고, 사랑스럽고...


셜록은 가슴 저변에서 밀려오는 어떤 감정을 두꺼운 약이라도 되는 듯 삼켜서 다시 아래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긴 몸을 밀어넣어 시트에 눕혔다. 갑자기 한없이 졸렸다. 여기서 죽을 것 처럼.

이제 그의 마음 속 궁전에 남은 열린 방은 단 한 칸. 이것과 같은 방 뿐이다. 그토록 많은 방과 복도가 있었지만 그 어느 곳도 셜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열려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한 번 머물러 보기로 했다.


얼마만에 꿔보는 꿈일까.

눈을 감으면 그가 있다.


멍청한 일이야, 마음 속의 검은 그림자가 중얼댄다.

그런데도 너무 반가워서...

셜록은 앞으로 조금 더 걸음을 옮겼다. 이제 기억한다.

그 향기, 그 내음, 그 모습, 그 머리칼, 그 모든 것들이...


손을 잡아본다. 잡힌다. 머리칼을 만져본다. 만져진다.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깊은 고동빛...

머리칼은 분명 밝은 갈빛...

어디로 갔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그의 유일한 친우, 그의 마음 속 궁전에 남은 방의 주인.

셜록은 이내 그를 끌어 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는 뒤돌아 미친듯이 달려나간다.

다시 그 거실 속, 성질 고약한 자신의 모습이 있다.

창문 바깥으로 도망치듯 달려나가는 존이 보인다.

이성을 잃고 달려 나간다.

미끄러질 듯이 계단을 내려간다.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어

그게 다가 아니었어

조금만 더 물어보고 싶었어


어째서 그렇게 빠른걸까. 원래도 그렇게 빨리 달렸던가?

셜록의 마음 속 궁전의 통로처럼, 존이 달려나간 런던의 거리 거리도 검고 어둡고 아득하다.

오직 그 앞에 달려나가는 한 남자를 제외하고.

셜록은 이내 끝없이 달려나간다. 언제든 잡힐까, 어떻게든 가까워질까.


손 끝에 닿을듯 말듯

어둠이 조금씩 밝아진다. 왠지 모르게 두려워진다.

이 어둠이 밝아지면 더 이상 존을 쫓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어둠이 더 밝아지기 전에 그를 잡아야 하는데.


이내 뻗은 그 손 끝에 서 있는 존이 보인다.

그는 흐느끼고 있다.

군인 특유의 인내심으로 어떻게든 참았던 것들이 그의 얼굴에서, 품에서 미친듯이 흘러 넘친다.

어디서 어떻게 다시 다듬어 올려서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진다.

어떻게든 손에 닿으면 모든 게 풀릴 것만 같았는데, 막상 손에 닿고 나니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떻게 해야 좋은 거지?

이제는 그 마음 속의 검은 그림자도 아무 말이 없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슨 말이든 꺼내본다.


매일 밤.

그 추격전은 반복된다.

생각하고 내뱉는 말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깊어진다.

어떤 말을 꺼내도 좀처럼 돌아봐주지 않는다.

이미 그 답은 알고 있음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네는 어떻게 그런 말을 나한테 했었던 걸까. 어떻게 그렇게 분명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남자이다.

셜록은 이제 모든 것을 열어두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마음 속 궁전의 다른 방들을 열어보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방은 분명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들의 주인은 단 한 명.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바로 잡아줄지, 어떻게 하면 바라봐줄지 묻고 싶지만

이제 그는 답이 없다.


밤이 되면, 나는 도망치듯 달려가던 그를 따라 달려가
뒤돌아 있는 그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고는 그를 멈춰서.

아무리 흔들어도 돌아보지 않는 그의 귓가에 대고
흐느끼기만 하는 그 등을 붙잡고 내 사랑에 대해 말하지.

되돌릴 수 있을까,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그가 고개를 돌릴 때가 되면 다시 아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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