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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PSYCHE 10화

PSYCHE - M.Butterfly

A Postscript

by 김뇨롱

작은 손짓으로 흉내낸 나비가 창가에 앉아 천천히 날개짓을 하다가 이내 멀어져 기차 내부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주변이 푸른 자연으로 물든 기차 안에는 편안한 적막으로 가득 차 있고 소녀가 손짓하는 나비는 갑자기 기차가 다음 역에 정거하면서 앞좌석 남자에게로 쏠려버린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소녀의 아빠는 금새 소녀를 부드럽게 안아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다. 마이링겐 역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퍼지고 소녀의 아빠는 어색한 영어로 맞은 편 장신의 중년 남성에게 정중히 사과를 한다.


"괜찮습니다." 중년 남성은 프랑스어로 대꾸한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상기된 소녀의 아빠가 말했다.


"영국입니다."


"프랑스어를 무척 잘 하시네요."


"간단히 대답하는 정도만 하지요." 두 사람의 대화에 차내 분위기가 좀 더 포근해진다. 호기심을 느꼈는지 그들 맞은편 창가에 앉은 노부인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고어텍스로 차려입은 외투에 단단히 장비한 백팩과 옆에 축구 유니폼을 입은 채 잠든 노인까지, 영락없는 영국인으로 보인다.


"나도 영국에서 왔어요. 영국 어느 도시에서 온 거유?" 영국 사투리가 진하게 베인 음성이었다.


"런던입니다. 어디서 오셨나요?"


요크셔, 코니시, 노팅엄... "코니월이라우. 스위스는 처음인가요?"


남자가 말하려는 사이 마이링겐을 떠나는 기차의 방송음이 들려온다. 남자는 잠시 고개를 들어 방송을 듣고는 노부인에게 말한다. "처음은 아니지만...스위스는 늘 대단하죠."


그렇죠? 하고 시작한 노부인의 수다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영어를 집중해 듣던 소녀의 아빠도 다시 꾸벅꾸벅 잠이 들고 주변의 광경이 수없이 바뀌는데도 노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부인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기차가 알프바흐 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뜨자 남자는 간소한 차림과 짐을 다시금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부인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역에 내리시는 거유?"


"맞습니다. 여기 굉장한 폭포가 있거든요. 기회가 되시면 다음에 와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기차에서 내려와 플랫폼에 다다랐다. 그 말고 몇몇 사람들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기차에서 내렸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내린 자리 그대로 스위스의 웅대한 자연을 바라보느라 감탄했지만 남자는 별다른 기색 없이 그대로 역사를 떠나기 바빴다.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 중에서도 특히나 눈에 띄는 장신의 중년 남자는 간소한 차림이었는데 그가 썬글라스를 끼우고 모자를 쓰지 않았더라면 관광객이라는 걸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다.


남자는 역사 근처에서 그대로 걸어서 푸니쿨라 하부역에 도착했다. 이제 막 5월이 되기 시작한 시점 푸니쿨라는 가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왼쪽 팔목에 채운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시. 티타임을 즐기기에는 그리 늦지 않은 시각이었다. 61도의 경사, 714m의 길이...최대 24인승의 푸니쿨라. 가파른 경로를 레일로 내려오는 푸니쿨라에 남자가 탑승했다. 몇몇 관광객들은 수시로 상승하는 푸니쿨라가 보여주는 마이링겐 마을의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내 푸니쿨라 상부역에 도달하고 남자는 푸니쿨라에서 내려 그대로 라이헨바흐 폭포를 볼 수 있는 전망대로 향했다. 바위 틈에서 솟구쳐나와 거친 능선을 그려가며 2단계를 걸쳐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형세를 남자는 잠시 바라보기만 하였다. 몇몇 관광객들은 사진을 잔뜩 찍기도 하고 서로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겁을 잔뜩 먹고 전망대 아래를 흘깃 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남자보다 먼저 푸니쿨라를 탑승하고선 그 자리를 떠나갔다. 남자는 사람의 소리가 거진 사라진 적막 사이로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폭포의 소리를 잠시 감상하다가 다시 자리를 이동했다. 3개로 나뉘어진 전망대에선 위치마다 다른 각도로 폭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남자가 마지막 세 번째 전망대에 다다르고 나서야 다른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망대에 있던 남자는 중년의 남자보다는 젊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척한 모습이었다. 중년의 남자는 그대로 걸어서 남자의 옆에 자리했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세찬 폭포의 소리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접선 치고는 제법 먼 곳까지 불러내셨는데요, 존."


"홈즈 씨."


"마이크로프트라고 부르세요."


존은 폭포의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마치 그의 영혼이 폭포에 실려서 그대로 낙하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어떻게 지내나요?"


"뭐, 살아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죠." 마이크로프트도 그를 따라 폭포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너머, 거친 물살에 닦여나가는 바위가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저 물에 스치고 깎여가며 모양을 만들어나가는 바위들...그러나 그렇게 깎여나가기 직전 까지는 물살을 튀겨내는 것 또한 그 바위가 아니던가. 묘한 마음에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얼굴을 정리했다. "간단히 저에게 문자를 했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아니면 전화나..."


"국제전화 수신료가 좀 비싸야 말이죠."


그 말에 결국 마이크로프트의 웃음이 터졌다. "아, 미안합니다...하지만 당신이 처음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 정도로 수고를 감당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 점은 저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존이 처음 마이크로프트를 찾은 것은 마이크와 칼앤에릭 심리센터를 다녀오고 바로 차에서 뛰쳐나간 그 날 밤이었다. 대뜸 디오게네스 클럽 면전에서 그를 찾은 존 때문에 마이크로프트는 무척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가 문득 셜록에게 연락하려고 들자 존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말려대기 시작했고 그 시점부터 마이크로프트는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죽음. 그가 마이크로프트에게 원한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사람, 고통 속에서 셜록과 겪은 갈등, 가까운 의사 친구에게 상담해서 꿈 속의 사람이 누군지 정체를 밝혀내는 일까지...가까운 의사 친구라봐야 마이크 스탬포드일 게 뻔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엿한 형으로서 그는 자신의 동생이 이제껏 가장 가까이 했던 사람의 '실종'이 동생을 얼마나 몰고 갈지도 충분히 계산에 넣어야 했다. 그래서 그가 맨 처음 존에게 건넨 조언은 바로 관계의 회복이었지만 그 다음 존의 대답이 모든 것을 끊어내버렸다. 그는 셜록에게 '감정'이 있었고 이런 류의 것은 마이크로프트가 처음 처리해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셜록에게 호감이 있거나 셜록이 상대에게 가벼운 호감을 지니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동생은 그런 것을 처리해낼 수 있는 인물이 못 되었다. 그제서야 마이크로프트는 존이 조심스레 건넨 '밤마다 찾아오는 사람'이 어떤 어감으로 전달한 것인지를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이후로 마이크로프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사라지게 하기 전 반드시 묻는 질문을 덧붙였다.


'한 번 사망하고 나면 다시는 셜록 앞에 나설 수 없을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존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그가 날 찾아낼 수 없다면 나도 그를 찾지 않을 거니까요.'


전적으로 마이크로프트의 실력을 도발하는 듯한 대답이었지만 그는 별다르게 동요하지 않았다. 셜록이 누군가를, 특히나 이미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파악한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찾아내는 일이라면 정말 막아내기 어려울지도 모르니까. 마이크로프트가 준비한 여러 공간 중에서 존이 고른 공간은 스위스 베른의 마이링겐이었다. 아프간 참전 전부터 가고 싶었던 관광지라는 게 이유였다. 흔히 여행사에 널려있는 팜플렛 속 대자연이 아닌 한 폭포를 고른 점이 특이하다고 여겼다. 초반에는 그렇게도 생각했었다. 지나치게 값어치 나가는 자살장소를 고른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나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태도와 반대로 존은 지극히도 보수적인 남자였다. 그는 마이크로프트가 알려준 지시대로 여권과 물품을 챙기고 시계에 맞춘 듯 취리히에서 루체른을 지나 알프바흐에 도달했고 지정한 숙소에 도착하여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어언 1년, 마이크로프트는 그간 분기마다 이 조용한 마을 어귀를 찾아 그의 근황을 살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셜록의 소식을 직접 전해주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8자 암호로는 그런 것들을 모두 전달할 수 없었으니까.


두 남자는 여전히 폭포 속에서 늘상 주고받던, 그러나 3달 마다 한 번씩만 나누던 대화를 여지없이 나누었다. 큰 표정 변화나 웃음은 없었지만 정경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이내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더니 간단히 목례하고는 자리를 나서다가 잠깐 멈춰서서 물었다.


"후회하지는 않는 겁니까?"


"...무엇을요?"


"이렇게 한 것이건, 내 동생을 만난 것이건."


두 사람 너머로 스쳐가는 폭포 소리가 유난히 세차게 들려왔다.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모두 쓸어담아 위로 올려둔다 해도 다시금 쏟아지는 물살을 영원히 막아둘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그 이후부터는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존은 잠시 미소지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마음 쓸 필요가 없어요. 이미 저지른 일은 끝난 일이죠."

(Things without all remedy Should be without regard: what’s done is done)


"셰익스피어라니, 제법 고전적이군요."


"상투적이고요."


존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폭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이크로프트는 걸음을 재촉해 자신이 타고왔던 푸니쿨라 상부역으로 향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3분 이내에 푸니쿨라가 도착했다. 그가 하부에서 탄 것과 마찬가지로 약 5분 정도 걸려서 푸니쿨라 하부를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세상에, 여기서 또 뵙네요!"


마이크로프트는 푸니쿨라 하부에서 탑승을 기다리던 노부인을 다시 만났다. 노부인은 아까 전 살갑던 그의 반응을 기억한 듯 그에게 반색했다. 그녀 주변을 바라보던 마이크로프트가 자연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부군께선 어디로 가신 겁니까?"


"부군이요?" 노부인은 웃던 얼굴을 잠시 일그러뜨려 놀란 듯 반응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불길함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남편이라면 여전히 코니월에 있지요. 여긴 저 혼자 여행왔구요.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아까 따라서 내릴 걸 그랬어요!"


"그렇다면..." 마이크로프트는 순식간에 아까 전 노부인 옆의 노인을 상기했다. 축구 유니폼에 잔뜩 수그린 채로 잠들어있던 노인...키는 제법 컸지만 그게 그토록 신경쓰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키가 지나치게 컸다. 하지만 그를 더 혼란스럽게 했던 건 바로 그 적막이었다. 노인은 그대로 모자를 눌러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잠들어 있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지나칠만큼 조용했다. 마치 모든 대화를 엿듣고 싶기라도 한듯이...


불길한 예감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바로 노부인을 따라 다시 푸니쿨라에 올랐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푸니쿨라가 상부로 올라가는 5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그는 되는대로 존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기 위해 특수 프로그램을 작동시켰지만 그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았다. 상부에 도달한 순간 그는 전망대를 향해 질주했다. 바로 전에 존을 만났던 세 번째 전망대에는 존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전망대에서도 허탕을 치고 전망대 주변에 마련된 박물관까지 둘러보았지만 존과 인상착의가 같은 사람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이내 그가 첫 번째 전망대에 도달했을 때 적중했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관광객들이 한참 웃다 떠난 빈 공간에는 무언가가 전망대 난간에 매달려 휘날리고 있었다. 이 시점에도 마이크로프트는 그 휘날리는 종이에 불현듯 아까 전 기차에서 보았던 소녀의 나비가 생각났다. 그는 기시감을 없애가며 그 앞으로 다가가 쪽지를 잡아뜯었다.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쪽지는 폭포의 튀는 물방울에 몇 군데 젖어 있었지만 내용을 훼손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부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보였다.


[나의 죄를 다시 내게 주시오.]

(Give me my sin again.)


마이크로프트는 이내 허탈한 심경으로 전망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보다도 더 강한 기세로 폭포가 밀어닥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이 필체를 지나치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와 심경, 어쩌면 존의 모습까지도 그 아래로 떨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셜록이 데려간 존의 수색을 시작하기 전 아주 잠시동안 그는 그 풍경에 모든 감정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도 다른 관광객들이 하던 양으로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 폭포의 목표점을 바라보았다. 무저갱으로 치닫는, 끝도 없고 시작도 없을 지리한 추격의 접점에, 끝끝내 맞닿는 이 기이한 인연에 자신도 휘말려버린 것을 자각하면서.



- PSYCHE [M.Butterfly]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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