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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PSYCHE 02화

PSYCHE - 2

꿈에서부터 시작된 사랑

by 김뇨롱

밤이 되면 찾아온다.


저 빛의 장막을 거치고, 끝없는 어둠 속에서 오직 손길과 체취만으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사랑 앞에 말을 꺼내보려 하지만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것은 상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다. 그리고 그 손가락 위로 포개어지는 것은 손가락에 비할 바 없이 부드러운 상대의 입술이다. 정중한 거절은 이내 몸속의 울림을 바라는 작은 떨림으로, 안타까움으로 변한다. 손길을 더듬어가며 모습을 찾아보려 하지만 이내 밀려드는 미열과 체취와 신음 앞에서 아지랑이처럼 모든 것들이 흩어져버리고 만다. 자신의 안쪽으로 깊이 들어온 사랑에 온 마음이 휘청일 때 즈음, 낯선 비프음과 함께 건조한 런던 아침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마이크는 최대한 정리를 해보려 애썼다. 방금 전 들이킨 맥주가 점점 더 자신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더 정신 차리기 위해 그는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자네가 그런 꿈을 꾸게 된 게 얼마나 되었다고? “


”거진…3개월. “ 존은 어딘지 모르게 망설이는 느낌을 풍기며 대답했다.


”그래…그러니까… 자네 꿈에, 나온다는 거지? “ 마이크가 확인 차 묻자, 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설마…그런 거야? “


”그런 거라니. “ 존은 은근슬쩍 몸을 뒤로 뺐다. 이번에는 마이크가 망설였다. ”뭐, 전문가를 본다던가 말은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말이야… 대놓고 말하자면 그런 거 아니냐고. 사춘기 소년들이 환상의 소녀를 꿈꾸며 저지르는 몽정 같은 거 말이야. “


그 말에 존은 마이크를 바라보던 것도 그만두고 자신의 술잔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처음엔…”


처음에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둠 속의 어떤 손길뿐이었다.


유난히 긴 그 손가락이 자신을 이끌고 가는 꿈. 그게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한다. 그 부드러운 손가락과, 부드러운 얼굴.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끝없는 어둠뿐.


마주한 얼굴, 눈, 코, 입 모두 느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첫 입맞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품에 안겼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빛의 장막 속에서 한없이 자신에게 사랑을 쏟는 상대에 대해 알 수 있는 거라곤


부드러운 손길과 입맞춤, 얼굴이 맞닿았을 때 느껴졌던 머리카락의 감촉뿐.


그러던 것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라면 사소했다. 입맞춤 후에 그를 안게 되었을 때 문득 느꼈던 것은… 그가 자신보다도 키가 큰 남자였다는 것.


입을 비죽이며 비아냥댔다. “비키니 차림을 한 플레이보이 표지모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이 시점까지만 해도 셜록에게 지나가는 투로 말해볼까도 생각했다. 한 치의 호기심은 없겠지만, 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니까.


그리고 어느 날 오후,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돌아와 무심코 차를 준비해 자리로 돌아가던 차에, 옆으로 스치는 셜록의 체취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찰나였고, 별 일도 아니었다.


’ 원래 저런 향이 났던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고, 자신 속의 자신이 말한다. 애초에 그런 거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가깝게 있을 수가 없다.


블랙 피터의 사건을 수사하기 전 까지는. 어둠 속에서, 상대를 기다리며 잠복하는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좁은 공간에 있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기다리던 상대가 나타날 때 즈음, 잘못 밟은 물건 때문에 상대가 알아차리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셜록이 존의 입을 막아준 덕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다가온 감촉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존은 또 하나, 의문을 늘려갔다.


’ 그렇게 부드러운 손이었던가?‘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도 모르게 시작한 탐정놀이가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꿈에서 만나는 이의 모습은 점점 더 자신의 동거인으로 변해갔다. 그 부드럽고 기다란 손가락도, 부드럽게 말린 것만 같은 머리카락도,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만큼 빠져들게 하는 그 체취도…


차를 들이켜던 손. 그 손. 증거를 만지작대며, 핸드폰의 뒷면을 지탱하며, 가끔 자신의 손과도 스치는 손. 눈…. 그 눈. 아마 어둠 속에서 빛을 담지 못해 보지 못했겠지만 그 눈…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한 바다빛의 눈. 차갑고, 냉정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밤에는 불타오를 것만 같은 눈. 숨결, 그 체취. 잠시 뛰어나갈 때, 쌀쌀한 런던의 거리를 미친 듯 뛰어다닌 뒤 존스의 가게에 들어서며 외투를 벗을 적에, 음식을 가져갈 때, 생각을 모으느라 이리저리 활보할 때 스쳐 지나가는 그 체취. 흔들거리고 우스꽝스럽지만 한없이 부드럽게 그의 위에서 하늘거리는 머리칼. 그 모두가 밤이 되어 찾아오면 한없이 사랑스러운 것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미칠 것만 같았다.


차라리 집어치우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말로 자신을 다그치던 적도 있었다. 이런 꼴이라면 이미 아프간에서도 몇 번이나 보았다. 포로를 겁탈하거나 동료들끼리 사달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DADT. 묻지도 말하지도 말랐지만 그건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한다기보다는 도리어 일어난 일들을 덮는 데 급급하기 위해 만든 구호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존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보아온 소위 비역질이라는 것과 지금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의 명백한 차이점을 말이다. 입에 담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욕지기로 밀어내고 홀로 싸워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트에서 행인과 싸움질을 해대는 바람에 얼굴에 멍까지 든 적도 있었지만… 그날 밤. 얼굴의 상처를 추리하는 셜록을 뒤로하고 뛰쳐나온 비 오는 런던의 거리 한가운데에서, 아프간에서 의가사제대한 전 군의관 존 왓슨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는 밤에 찾아든 연인을 더 이상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밤의 장막에 들어서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으며


주저 없이 자신을 끌어안는 그 상대에게 빠져 있었으며


기어코 그 꿈의 장막이 현실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자신을 홀리고 있음에도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이성을 붙잡고 욕지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빌어먹게도 그는 자신의 꿈에 나오는 이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 몹쓸 꿈으로 인해 그가 자신의 동거인을 마음에 담게 되어버렸다는 뜻도 된다.


”…. “


마이크는 한 동안 말없이 잔을 만지작거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일까? 아니면 문제가 아닌 것일까.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더군다나 꿈에서 시작해서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전문가가 아닌 그라도 그런 이야기는 흔히 들어봤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말을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 나아질까. 차라리 병이라면, 치료라도 할 수 있는 것일까.


”날더러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어. 차라리 그게 병이라면 치료해버리고 싶으니까. “ 존은 최대한 무덤덤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이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최대한 애써서 그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무슨 소리야… 자넨 아프간에 간다고 말할 때 즈음부터 이미 미쳐 있었다고.” 그 말에 존이 피식 웃었다. 용케 끄집어낸 마이크의 유머 감각에, 두 친구는 잠시나마 미친 듯 웃을 수 있었다.


“내일 시간 돼?” 이번에 시간이 있냐고 물어본 건 스템포드였다. 존은 그런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냥… 맥주 한 잔 들이키며 다 쏟아내버리고 말아 버리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밤은 매일 찾아오니까. “ 마이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내 사무실에서 진행했으면 해서. “


”고맙네. “ 존이 짧게 한 마디 전했다. 마이크는 짧게 ’ 아냐-‘ 라 말하며 술을 들이켰다.


좋아하게 되는 게 병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마음 탓에 절망에 치달아 있다면, 차라리 치료하는 게 당사자에게도,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되겠지.


”뜻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되는 게 병이라면…“


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존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며 재차 물었지만, 그는 별말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밤 12시가 다 되어갈 때 즈음, 존이 초조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걸 보곤 마이크는 그의 등을 치며 이제 그만 파하자고 말했다.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틈이 난다면 필요할 때마다 존이 마이크를 보러 오는 것으로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나 이야기들보다, 스템포드는 밤이 다가올수록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존의 모습이 더욱 기억에 남았다. 밤이 장막을 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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