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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Jan 21. 2024

12월 31일 자정이 지난 순간의 설렘

우리 동네에는 꽤나 유명한 학원가가 있다. 학원이 끝날 즈음이면 아이를 태우고 내리는 자가용과 학원 버스로 왕복 10차선 도로가 밤낮없이 꽉 막힐 정도다. 그래서 근처의 먹자골목도 언제나 젊은 사람으로 북적인다.  

딸이 수능을 본 올해 나는 이 골목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밑에 이 먹자골목에는 수능을 마친 고3들이 잔뜩 모인다고 한다. 그리고 다 같이 5- 4- 3- 2- 1! 새해 카운트를 하고는 삼삼오오 술집으로 흩어진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얘기가 너무 재밌어서 딸에게 물었다.  

- 너 31일에 친구랑 밤늦게 공원 간다는 게 여기 가려고 그런 거지? 

그러자 딸이 웃으며 말했다.  

- 나도 들었어. 근데 거기는 안 가. 우리는 그냥 공원에서 맥주 마시기로 했어.  


12월 31일. 친구 부모님 저녁 늦게 공원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 약속이 취소됐다. 하지만 딸은 12시가 넘자 외투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랑 각자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 집에서 영상통하면서 그 술을 마시기로 했다는 거다.  

나는 딸이 편의점 계산대에서 점원이 신분증을 달라고 할 때 어떤 표정일지 눈에 선했다. 선뜻 신분증을 보여주며 뿌듯하게 외치겠지.  

- 여기요!

그리고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겠지.  


딸은 예쁘게 생긴 350밀리짜리 작은 와인을 한 병 사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흐흐흐-

나는 어쩐지 내가 처음 술을 마시는 것처럼 신이 났다.


다음 날 아침 딸이랑 밥을 먹으면서 어제 재밌게 마셨냐고 물었다. 딸이 막 웃으면서 말했다.  

- 친구가 빨간 뚜껑 소주를 산 거야!

- 어? 그거 독한 건데?

- 내 건 5도짜린데, 걘 25도야. 취했나 봐. 얘가 막 아양을 떨어!

- 너한테?

- . 막 콧소리를 내면서. 난 멀쩡한데. 

- 정말?  

- 걔 아양 떠는 거 정말 웃겼어!


나는 웃는 딸의 모습을 보며 녀석의 어떤 설렘이 느껴졌다. 딸의 미래는 이제 막 코앞에 도착한 모양이다. 그리고 딸을 보는 나는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뭔가가 갈비뼈 밑에서 빠져나간 듯, 뻐근한 아픔이었다.  


것이 새해의 시작과 함께 내가 처음으로 느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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