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생의 모양

단편소설 <젠가> 5화.

by allen rabbit

***


아빠는 맥주를 마시며 AI에게 조명을 바꾸도록 명령했다. 마루 조명은 '불타는 루비'에서 이제 '사바나의 일몰'로 바뀌었다. 집에서는 아무도 아빠와 대화하지 않았다. 엄마는 늘 밖으로 돌았고, 시윤은 시윤대로 바빴다. 우리 단지에는 천 세대가 넘게 살지만 아빠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 아빠는 TV를 음성으로 켜고 끄는 걸 배우더니 곧장 AI 어시스턴트를 샀다. 그리고 스마트 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든 블루투스 기기를 음성으로 조정하고, 커튼과 거실의 불도 음성으로 켜고 껐다. 아빠는 점점 대화 기술이 늘었고, 이제 집에서 대화하는 상대는 오로지 AI 어시스턴트 뿐이었다. 시윤은 602동도 가족과 대화를 했는지, 옆집 사람들과 알고 지냈는지 궁금했다. 시윤이 맥주를 마시며 아빠에게 말했다.


“뉴스 찾아봤더니 602동 아저씨, 회사에서 엄청 괴롭혔데. 일 못 한다고.”

“그것도 다 옛날 사람들 얘기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런 말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던데?”

“아빠,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어. 그냥 포기하는 거야. 안 다치려고.”

“포기 한다고?”

“처음엔 다들 잘하려고 하지. 그런데 금방 알게 돼. 학교 다니면서 계속 느꼈던 거. 내 위에 애들 많다. 게다가 이 회사가 날 평생 케어해 줄 것도 아니고. 조건 맞으면 바로 옮겨야지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그냥 혼내면 혼나고 마는 거야.”

“그래도 다들 자기 계발에 투잡도 하고 열심히 사는 거 같던데?”

“요리조리 피할 방법을 찾는 거지. 더 좋은 대학 가려고 편입하는 것처럼. 어차피 걔들 다 죽어. 죽게 돼 있어. 뭐. 갓생 아무나 하나.”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빠, 진심이야?”

“얘가 왜 정색하고 그래?”

“뭐든 하는 게 정말 안 하는 것보다 나아?”


당황한 아빠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


얼핏 잠든 꿈속에서 시윤은 인공위성처럼 지구 궤도를 돌았다. 발아래 지구가 애드벌룬 만하게 보였다. 지구는 그저 파란 구슬 같았고 인간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신이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위성은 지구에서 멀수록 오래 떠 있고 가까울수록 빨리 추락했다. 시윤은 멀어지고 싶었다. 속력을 더해서 더 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도경 오빠는 지금 어디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시윤은 갑자기 추락하기 시작했고 화들짝 잠에서 깼다. 맹렬한 추락에서 깨어난 시윤은 등골이 서늘했다. 이대로 발가벗겨진 채 세상에 던져지는 게 두려웠다. 시윤은 고개를 돌려 남자애를 봤다. 속을 울렁이는 불안이 남자애를 갖겠다는 욕망으로 변했다. 시윤은 TV를 보는 남자애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남자애가 물었다.


“또?”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애는 시윤의 배 위로 올라가려 했다. 시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시윤은 남자애가 샤워기 아래에서 그랬듯이 그의 머리를 붙잡아 다리 사이로 내렸다. 그러자 시윤의 의도를 알아챈 남자애가 고개를 뺐다.


“싫어.”

“해.”

“아니. 싫어.”

“왜?”

“싫다고.”


시윤은 다시 억지로 남자애의 머리를 잡아 숙였다. 그러자 “에이 씹-” 남자애가 거칠게 시윤을 내팽개쳤다. 시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욕망으로 변했던 울렁이던 불안이 지독한 모욕감으로 되돌아왔다. “이건 공평하지 않아!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는데?!” 격렬한 분노가 시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시윤은 몸서리가 쳐져 견딜 수가 없었다.


“야! 개새끼야! 야! 해! 왜 안 해! 해!”


시윤이 베개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하지만 남자애는 얄밉게 피하면서 한 대도 맞아 주지 않았다. 시윤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야! 씨발놈아! 이 더러운 년!! 개 같은 년!”

“아이씨!”


짜증을 내며 남자애가 침대를 내려갔다. 시윤이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

“뭔데?”

“내가! 나는…!”


머릿속의 단어들이 죄다 다시 조립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윤이 외쳤다.


“내가 바키야! 바키!”

“뭐 바퀴? 바퀴벌레?”


시윤은 블러디 퀸이라고 바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빵-터진 남자애는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시윤이 주먹을 날렸다!


“웃지마!”


하지만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시윤은 꼴사납게 바닥에 자빠지고 말았다. 남자애가 짜증스레 말했다.


“무슨 짓이야?”


모텔 바닥에 누워 어째서인지 시윤은 602동을 생각했다. 그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모욕이 계속돼도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모욕을 이겨내고 한 층을 더 높이 쌓기 위해, 발전하기 위해, 더 나아지기 위해. 하지만 그는 속도를 잃은 인공위성처럼 지구로 떨어지고 말았다.

시윤은 인생을 몰랐지만 이제 그 모양은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시윤에게 인생은 젠가 같았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평생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는 것도 그랬고, 앞으로 그 위에 뭐가 얹어질지 뻔히 보이는 것도 그랬다. 너무나 끔찍하고 노골적이었다. 그 속에는 떡볶이를 먹으며 울던 시윤도, 라미를 보며 자존감을 걱정하던 시윤도 있었다. 시윤이 이렇게 29년을 쌓은 젠가는 그러나 그중 하나만 잘못돼도 너무나 쉽게 와르르 무너질 게 뻔했다.


딩동-

현관 벨이 울렸다. 배달이었다. 남자애가 너도 먹을 거면 계산도 하라는 표정으로 시윤을 돌아봤다. 여닫이로 된 이 방의 유일한 창문이 보였다. 여기는 7층이고 지구와 너무 가까웠다. 시윤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1 더하기 1은 2지. 암, 당연해서 좆같네.”

“달라고 하지 마라.”


화장실로 향하는 시윤을 향해 남자애가 말했다. 시윤은 욕조 안에 들어가 앉았다. 한바탕 욕을 하고 나니 어쩐지 세상이 덜 무서운 것 같았다. 힘도 세진 것 같았다. 치킨을 받아드는 남자애의 신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시윤은 남자애도 이만 원짜리 치킨처럼 만만하게 느껴졌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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