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젠가>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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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자율 좌석제로 전환하려 했고 시윤은 이 프로젝트의 팀원이었다. 지정 좌석을 없앰으로써 다른 부서 사람들과 자연스레 섞여서 창의적이고 협력적인 환경을 만든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곧바로 직원들의 반발을 불렀다. 소속감을 잃을 수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출근 때 사원증이 필요하듯, 소속감은 자기 책상에서 생기는 건지도 몰랐다. 결국 프로젝트는 무산되고 말았다.
팀장은 일이 끝나고 동해로 연수를 잡았다. 때마침 무더운 한여름이었고, 팀장은 바닷가에서 수영이나 하자며 밑밥을 깔았다. 하지만 비 때문에 사람들은 연수 내내 호텔에 갇혀 있어야 했다. 마침 호텔에는 팀장이 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도 와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두 팀이 함께 술을 마시게 됐다. 그리고 그 속에 도경이 있었다. 한참 술이 올랐을 즈음 누군가 시윤이 옷 안에 입은 수영복을 발견하고 놀렸다. 무안해진 시윤은 그제야 아침에 비 오는 걸 보면서도 수영복을 입었던 걸 떠올렸다.
“저도 수영복 입었어요.”
도경은 바지를 내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팬티였다. 밴드에 커다랗게 상호가 박혀있었다. 도경이 말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죠. 실내 수영장이 있을 수도 있고. 안 그래요? 시윤씨?”
사람들이 다른 화제로 넘어갔을 때 도경은 시윤에게 사실은 그냥 팬티였다며 웃었다.
“깜빡 속았죠?”
시윤은 도경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자 저절로 도경에 대한 정보가 모이기 시작했다. 키 큰 호남형의 도경은 4년 연상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교육자 집안에 학벌도 좋았다. 도경은 어떤 모자람도 없는 남자였다. 싹싹하고 늘 자신감이 넘쳤다.
그 뒤로 도경은 회사 회식이 있거나 하면 팀장을 핑계로 달려왔다. 하지만 누가 봐도 시윤 때문이었다. 때문에 팀원들은 당연히 도경과 시윤이 사귄다고 생각했고, 도경의 안부를 시윤에게 묻기도 했다. 시윤이 사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도경은 자기 꿈을 얘기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미국 MBA 과정에 뽑히는 것, 그리고 30대에 연봉 3억을 받는 게 꿈이라고 했다. 도경이 시윤에게 물었을 때 시윤은 자기도 모르게 작가가 꿈이라고 답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 와. 대단하다. 무슨 글을 쓰고 싶어?”
시윤은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질문에는 늘 질문하는 사람이 기대하는 답이 있는 법이고, 시윤은 적당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도경은 무슨 책을 보느냐, 쓴 글이 있느냐 물었다. 시윤은 떠밀리듯 글쓰기 강좌를 등록했다.
글쓰기 수업을 다닌 지 두 달쯤 되는 어느 날. 시윤은 집으로 오는 길에 버스를 잘못 내렸다. 시윤이 다니던 초등학교 앞이었다. 학교 앞에는 그 시절 자주 들렸던 분식집이 그대로 있었다. 시윤 또래의 여자가 새 주인이었다. 시윤은 떡볶이를 한 접시 시켰다. 젊은 가게 주인은 떡볶이를 내어주고 튀김을 튀겼다. 뜨거운 기름에 튀김을 척척 튀겨내는 주인이 굉장히 우아해 보였다.
문득 초등학교 때 연극이 떠올랐다. 혼자 여러 배역을 맡았던 시윤은 옷을 여러 벌 겹쳐 입어야 했다. 퇴장했다가 다시 나올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었다. 연극은 별로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시윤이 옷을 잔뜩 껴입고 뒤뚱거릴 때마다 웃어댔다. 시윤이 울면서 말하자 엄마는 야단을 쳤다.
“그러니까 살 좀 빼!”
시윤은 그것을 그냥 견디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어떻게든 맞춰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시윤은 튀김도 시켜서 떡볶이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그리고 글쓰기 수업에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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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가 왜 같이 있자고 했는지 안 궁금해?”
시윤은 벌거벗은 채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여전히 몸이 더웠다. 남자애가 일어서며 물었다.
“뭐 마실래?”
“안 궁금하냐고.”
“말하고 싶어?”
또 되묻는다. 배려하는 듯하지만 정중한 거절도 포함된 적당한 대답. 남자애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온 모양이다.
“말하고 싶으면 해.”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애는 자기에 대해 얘기할 거라 생각 한 모양이다. 잘 생겨서, 잘할 거 같아서 등등. 하지만 시윤은 남친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남자애가 물었다.
“뭐 시켜 먹을래?”
“아니. 됐어.”
시윤의 대답에는 아랑곳없이 남자애는 배달앱을 열었다. 치킨을 시키려는 모양이다. 시윤은 아빠에게 아직 답 문자를 보내지 않은 게 기억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