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편지
유화와 대리석 작품들에서 잠시 벗어나 무의식과 무한의 세계로 눈을 돌리는 시간. 언젠가는 고전 미술이 될 현대 미술 작품들은 참 흥미롭다.
작품을 보자마자 떠오른 영화 대사.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을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한다면 이게 아닐까 싶을 정도. 푸른색 그리고 초록색. 거울을 보는 듯하지만 여기저기로 파편화되어 초점이 사라져 버려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 정돈되고 날카롭고 예리한 유리조각의 깔끔함과 대비되는 즉흥적이고 어수선하고 복잡한 추상화. 재료와 주제가 엇갈린다. 돌출된 2개의 자아, 교차되는 선은 끝자락에서 딱 2번 마주친다. 이해의 지점이 어긋나는 순간들. 어떻게 이런 작품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완전히 다른 장르의 예술 작품에서 데자뷔를 느끼는 순간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림을 그리고 난 뒤의 화가의 팔레트 같다. (모네의 수련 연작 중 하나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그럴듯해 보인다.) 오늘 화가가 그린 그림이 무엇일까 유심히 바라보다. 어제 코톨드 갤러리에서 본 르누아르의 <Spring, Chatou>가 떠올랐다. 어제 오랫동안 작품을 바라보면서 눈에 익은 색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팔레트는 어쩌면 그림의 초안이자 친정한 완성작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감들을 씻어내리는 화가는 그날의 그림이 만족스러웠을까 아님 실망스러웠을까? 그 감정까지 언뜻 느껴보고 싶었다.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감광판 씬이 생각난다. 문소리의 대사들이 떠다니는 듯한 기분. "사장님은 저 싫어하세요?", "남자가 왜 태어났는지 아세요? 여자한테 상처주려구요." 알루미늄 판 위의 하얀 면에는 상처 입은 사람의 표정이 투사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이 건져 올린 사진들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추억들이 담겨있지 않을까. 기억을 생생히 보존해 준다는 것이 사진의 장점이자 단점이니까.
대학교 교양 수업 때 그의 작업 방식을 중광과 비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실제 그림을 눈앞에 두고 보니 더 비슷한 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감한 붓터치와 선의 굵기 변화, 물감의 뭉침과 풀어짐까지. 이 작품을 그리기 전 그가 골똘히 생각하던 것이 궁금해진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불안감이 그 시작이자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을 보지 않았을 때는 <Lion King>의 무대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막이 올라가면 어떤 황홀경이 펼쳐질까? 어안이 벙벙하게 홀린 상태로 객석에 불이 들어오는 인터미션일까?라는 기대감을 담은 이미지.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대성당도 비슷하지 않을까? 신의 영역에 발을 딛는다는 신성함. 나에게는 신이 예술이었을 뿐이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조합은 마치 불과 재같아서 열정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색면 작품은 각 색깔이 주는 특징이 강조되어서 좋다.
같은 구도의 동양 작품이 떠올랐다. 동서양의 확고한 차이가 드러난다. 경계와 그걸 허무는 방법, 다양함을 드러내는 방법이 다르다. 동야에선 먹의 색으로 다양한 빛깔, 번짐을 담아낸다면 서양은 확실한 색의 경계, 그 안에서의 그라데이션, 색의 움직임 묘사와 질감 표현이 나타난다.
닿을 듯 말 듯 간질 간질한 기분. 만나는 순간보다 더 짜릿하고 설레는 시간이 와닿는다.
잠에서 깨면 모든 게 사라질 것만 같다. 그녀와 그녀가 보는 세상 모두.
영상이 3-4개의 화면으로 분할되고 통합되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모습이 멋졌다. 마치 다성부 음악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보편성을 갖기 어려운 넋두리일 뿐이라는 인상을 바꾸어 놓은 작품. 지극히 지엽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의 힘이 느껴졌다. 세상에는 '단일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청중도 몇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개로 분할된 화면 속 한쪽에서는 비극이 반대편에서는 희극이 반복된다. 마치 세계의 은유를 담아놓은 것 같다. 우리는 생각보다 다른 쪽 화면의 세계에 무심하다.
무의식의 작업 순서가 궁금해졌던 작품. 무엇이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서 어디에서 끝을 맺는지까지. 색, 선, 움직임을 결정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우연인 듯 필연처럼 그려져 내 앞에 걸려있다.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그 자리에 주저앉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졌다.
책 <제49호 품목의 경매>의 중고 자동차에 숨겨진 이야기가 떠올랐던 작품. 그림 속 여인들을 연민하기보다 그 따뜻한 품의 온기, 머릿결, 찻잔, 웃음이 자아내는 생명력과 행복들이 와닿았다. 차가운 감옥의 좁은 공간에서 자유로움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제목 Gironde는 프랑스 남서부의 지방 이름이다. 화가의 눈이 부러워지는 작품. 풍경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까. 어떻게 보려고 노력하거나 외면하기 힘든 얄팍한 매혹을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있는 그대로 그렇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의 인생이 다른 의미에서 불행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건 이런 점이다.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음을 믿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