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

여덟 번째 편지

by 아트필러
20220802_124916.jpg Changing Room (Itelen Cammock)


조각, 그림, 집의 일부, 거미줄, 단순한 카메라 무빙, 단조롭지만 단호한 목소리의 내레이션,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영상, 하지만 멋지다. 자신에서 출발해 점차 세계로 이해를 확장해 나가는 이야기. 마치 시 낭독 같다. 평소 익숙한 집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런 고요한 관찰의 시간을 주었던 작품.


20220802_125041.jpg Shine Eye (Denzil Forrester)


빛나는 눈이 항상 기쁨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우울과 피로, 불안함과 두려움으로도 빛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감정도 잃어버린 채 무표정하게 말라버린 눈빛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자신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잠재성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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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 (George Fredric Watts)


눈 감은 자를 그렸으나 진정한 장님은 이 작품을 볼 수 없는 아이러니.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이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작품을 시각장애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눈이 먼 자만 느낄 수 있는 것이 희망이라면 이 그림은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니 텅 빈 것과 같이 무의미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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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 with Palmettes (Malcolm Drummand)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면 혹은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작품. 어떤 종류의 확신을 가진 사람. 그것이 삶에 대한 것이든, 사랑이든, 일이든. 하지만 확신으로 경직되어 있지 않고,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사람. 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된 사람.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품위를 잃지 않고 붕괴되는 사람. 소설 <샤를르와 룰라의 목요일>에서 룰라가 이런 모습이 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가장 여리면서도 단단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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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olva (Bruce Turner)


드가를 뛰어넘는 무용수 화가. 추상적이고 투박하지만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친다. 인간의 몸짓이 가진 매력을 최대치로 시각화해 낸 훌륭한 작품이다. 형태, 색감, 질감 모든 게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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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land Beach (Vanessa Bell)


짧은 이야기 하나.

해변가에서 매일 모래성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모래성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었다. 어디에 사는지, 몇 살인지, 왜 모래성을 만드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온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모래성을 만들면서 환하게 웃기도 하고, 서럽게 울기도 했다. 때론 모래성을 만들지 않고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노을이 지고 파도가 모래성을 무너뜨리면 그 사람은 해변을 떠났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날도 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치는 날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래성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매일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완벽히 그 모래성을 재현해 낼 수는 없었다. 수많은 모래성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나날들이 이어지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노을이 져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은 모래성 곁을 계속 지켰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불변이 된 모래성을 더 이상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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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Group (Henrry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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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라면 모두 이 조각상의 틀에 자신을 욱여넣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저항해도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무력감이 와닿았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 책임은 내게 지워졌고, 의무는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을 것이다. 부모가 되는 것. 그것은 태생의 속박이자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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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ulus (JMW Turner)


환한 빛이 눈에 가득 차는 경험이 그림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이날 오후 타워 브릿지에서 비슷한 장면을 마주했다. 그날 본 그림의 데자뷔 같은 풍경을 발견하는 일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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