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깊은 슬픔이 갈색 개로 표현되었다.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는 개는 죽은 이를 고요하게 내려다보며 마음으로 애도한다. 그 마음은 바람처럼 날아가버리는 말과 달리 깊은 바닷속에 쿵하고 내려앉아 오래도록 울릴 것만 같다.
좌측에 얽혀있는 4명이 흥미로웠다. 모두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근육, 손가락과 발가락 마디마디를 통해 느껴진다. 절박해 보이는 표정도 긴장감을 더한다. 말의 하반신보다 인간의 육체가 더 본능적이고 야생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투명한 눈물을 흘리고 싶다. 어떤 감정의 티끌도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눈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티끌이거나 티끌같이 잘 떨어지지 않는 감정이니까. 그냥 우는 건 쉽지 않다.
자화상, 특히 나이 든 사람의 자화상을 볼 때면 언제나 눈의 총기를 찾게 된다. 젊음은 그 자체로 빛나서 매력적인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늙고 초라한 육체에서 눈길을 끄는 건 눈빛이다. 그래서 눈이 빛나는 노인의 초상화는 생기 넘치는 미소년이나 치장한 젊은 여인보다 훨씬 아름답다. 총총함의 근원은 '자기 영혼에 대한 확신'이라고 느껴진다. 자신의 쇠약하고 볼품없어진 육체와 상관없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 설령 그것이 환상이며 거짓이라 해도 그것은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어둡고 우울하지만 빛나는 그림. 처음 보는 이미지의 막달레나였다. 그림 속 인물, 향유병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제목을 보지 않으면 미묘한 표정의 한 여인을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신의 은총은 빛나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자의 은근한 미소는 그것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지금 그림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Do you believe in God?" 아마 스스로 이렇게 답하겠지만. "Yes, I believe."라고.
내가 영국에서 느낀 감정과 풍경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낀 작품들.
나무가 있다. 오래된 벽돌 건물이 있다. 그보다 더 오래된 나무다리가 있다. 햇빛이 비추는 듯하지만 나무 그늘과 덤불은 조금은 어둡고 우울하게 분위기를 바꿔둔다. 짙은 푸른색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의 낯빛 같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마치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 같은 그림. 이곳은 내가 존재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나에게 선을 긋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 풍경이 딱히 감동스럽지가 않다. 화창한 하늘은 내 머리 위에 있지 않고 곰팡이 피고 벗겨진 벽과 나무 창살로 된 벽, 우울한 푸른색 보자기만 나의 영역 안에 온전히 존재한다. 마을과 거리에 섞이지 못하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의 악기상이 마치 나 같았다.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의 모습이 담긴 정물화
'조각 같은' 비너스의 탄생
인물을 그리는 것은 어렵다. 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나와 닮은 초상화를 받게 된다면 화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내 모습을 나답게 만들어주었는지. 눈의 굴곡? 콧구멍의 모양? 입술의 두께? 화가의 눈을 빌려 세상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특징을 알고 싶다.
사랑이 가득 담긴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이 그림을 보라고 하겠다. 놀라울 정도의 포근함과 나른함이 몰려와 주변의 번잡함 따위는 사라지게 만드는 두 입술을 보라.
구도와 인물들의 눈빛이 인상적이다. 오른쪽 남자는 뚫어지게 여자를 바라본다. 애정과 질투와 의심이 뒤섞인 눈빛이다. 왼쪽 남자는 핑크색 옷을 입고 어색한 시선처리를 하며 편지를 건네받고 있다. 온몸으로 부정을 티 내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여자 발 밑의 소년은 오른쪽 남자의 표정을 살핀다. 맨 왼쪽 아래의 소년은 두 눈이 갈 곳을 잃고 멍하게 프레임 밖을 응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이, 환멸이 난다는 듯이. 이 그림에서 한 명뿐인 여자는 가장 담담하다. 두 남자를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일까? 강인함과 연약함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아닐까.
제목을 보기 전 나는 묵주를 보지 못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얼굴 주변의 검은 물감 덧칠 자국들이 그녀의 감정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여자는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만으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소중한 타인, 한 때 자신이기도 했던 타인, 자식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순히 멀리 여행을 떠난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부터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의 기일에 기도하는 어머니까지. 어떤 상황이든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과 사건사고의 경중을 떠나 자식의 모든 일은 부모에게 걱정이자, 번뇌이자, 불안이니까. 그럼에도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염주 굴리기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언젠가 차를 타고 가다가 이런 여름 풍경을 본 적 있는 것 같다. 아직 아니라면 앞으로의 드라이브에서 이런 풍경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무의 색이 아닌 색으로 나무를 그려내는 화가의 시선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보자마자 그림 안으로 빨려 들어가 어느 화창한 날 적당히 낡고 어수선한 뒤뜰 정원의 점심식사에 초대된 것 같았다. 따듯함과 더움 사이, 페인칠이 벗겨진 울타리와 거칠거칠한 표면의 테이블, 탄산이 빠져 미지근해진 콜라,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벌의 윙윙거림까지 느껴졌다. 이 그림의 그런 마법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둡지만 따스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저 오래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멀리서 볼수록 이미지는 더 단순해지고 명확해진다. 어둠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유 없이 눈에 끌렸던 작품. 제목과 달리 처음 봤을 때부터 새벽에 동이 틀락 말락 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사랑하지만 가장 상처를 많이 받기도 한 한 사람을 영영 떠나기로 결심하고는 한밤부터 새벽까지 따듯한 품에도 안겨보고 얼굴도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작은 배를 탄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앞만 보는데 눈물이 고여 풍경이 일렁인다.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어제와 오늘 그 사람의 품과 모습이 아닌 지금의 이 풍경을 사진처럼 간직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걸 그려낸 게 이 작품이다. 내가 그림에서 발견한 이야기.
러시아군 폭격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들의 곁을 지키는 아버지의 사진이 자꾸 뇌리에 맴돈다. 이 그림을 보면서 현실은, 특히 비극은 극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사람은 깨끗하지 않고 남은 사람은 아무 표정도 없다. 다른 사람은 계속 흘러가는 현재를 살아간다. 꽃도 기도도 없다. 오히려 연극은 현실의 잔인함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극에서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까. 조명이 꺼지면 다시 일어나 방긋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니까. 하지만 현실엔 조명 따윈 없다. 죽음과 삶만 무정하게 반복될 뿐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이 그림을 봤던 기억이 났다. 어린 시절 내가 순간 스쳐 지나가며 여자의 이 표정을 바라봤다. 그때의 내 모습은 떠오르지 않지만 눈에 비친 것만은 시공간을 넘어 겹쳐졌다. 기억이 덮친다는 건 이런 뜻이구나. 오늘 봤던 그림들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