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 National History Museum

다섯 번째 편지

by 아트필러

영국에서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어느덧 새로운 숙소도 4일 차! 자연사 박물관, 마트, V&A 박물관, 우체국, 지하철 역은 구글지도 없이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대부분 직진뿐이지만 그래도 샛길이 꽤 많다.) 길에 익숙해지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예전에는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동네가 친숙해지고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 큰 지도가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일이 재밌다. 이런 면에서는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생존 전략일지도 모르겠지만) 창작을 하겠다고 (아니, 일기만이라도 꾸준히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쉽지가 않다. 숙소에만 가면 일단 핸드폰을 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면 글 쓰는 게 수월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어느 상황에서건 일단 뭐든 쓰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매 순간 뭔가를 쓰자고 결심하는 습관은 지루한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길, 박물관 개장을 기다리는 시간, 뭔가를 쓰거나 그리면 기분이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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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럽에서 한 이틀만 있으면 이런 대성당 느낌의 건물에 익숙해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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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오픈런 한 사람만 찍을 수 있는 사람없는 자연사 박물관

텅 빈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주인공이 된 듯한 오싹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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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박물관인가 동물원인가? 세상에서 가장 가성비 좋고 안전한 동물원이 아닐까? 신의 관점으로 보면 이곳에서 가장 신기한 전시품은 움직이는 공룡 모형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공간에서 거대한 모형들과 박제들을 보다 보면 섬찟함이 밀려온다. 흙으로 돌아갈 권리를 잃어버린 눈이 너무 슬퍼 보여서. 더 이상은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불멸을 욕망하지 않았던 존재가 불멸하게 된 불행이 전시된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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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4.5 million years old

가장 감명 깊었던 전시물. 동물 모형과 박제보다 훨씬 더 마음이 끌렸다. 가장 관심을 받지 못하고 스쳐 지나쳐지는 것 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시선의 따뜻함을, 무반응의 반응을 알아차리며 주고받고 싶었다. 처음에는 고요함이 다가왔는데 나중에는 희로애락이 담긴 예언서의 정서가 느껴졌다. 이 돌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런 당연하지만 놀랍게도 모두가 잊고 있는 진실은 담은 예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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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박물관의 BLUE ZONE

해초들의 모습이 마치 현대미술 작품 같았다. 이미 모든 영감과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 와닿았다.


미술관에서도, 박물관에서도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게 전시되어 있어도 그것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니면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에 있어야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적인 것처럼. 자연사 박물관의 전시품들도 흙 속에서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때 진정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인류가 멸망하고 건물이 무너지면 그들도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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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행을 함께한 물개 인형

p.s. Museum SHOP에서 눈에 밟히는 물개인형이 있어서 하나 입양했다. 난 마음에 완전히 들만큼 인상적이지 않으면 잘 사지 않는 편인데 이 인형은 자꾸 마음이 갔다. 가장 예쁘고 깔끔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두고 가려니 슬퍼졌다. (언젠가부터 파손된 것들에 마음이 간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버려지게 될 것 같아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점까지 사랑하는 것.) 결국 한 번 내려두고 돌아섰다가 다시 데려왔다. 한 끼 가격보다 비싼 아이였지만 그래도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 이름은 Mormon. 뮤지컬 <BOOK OF MORMON>에서 따왔는데 꽤나 그럴싸한 물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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