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편지
영국에서 얻은 것은 한국의 웨이팅은 웨이팅도 아니라는 인내심. 유럽에 살면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갈 때마다 매번 수많은 관광객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장 시간인 10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줄은 엄청나게 길어져있었다. 인기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오픈런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교훈을 얻었던 대영박물관 2번째 관람!
두 번째로 얻은 것은 '체관의 미소'. 분노, 짜증, 슬픔. 피곤을 초월한 바로 그 미소... 내가 <Heaven? 헤븐>의 이 가군의 미소를 짓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웃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Smile :)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릴 때 뒤에 한국인 부부가 있었다. 아무래도 신혼여행 브이로그 촬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로 말을 걸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한국어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는 게 새삼 다시 느껴지기도 하고. 누군가와 뭔가를 상의할 필요 없이 혼자 결정할 수 있다는 게 홀로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특히 삼시세끼 메뉴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메뉴는 남은 잔고가 결정해 줬다. 다음에 유럽에 온다면 누구랑 같이 오고 싶은지도 생각해 봤다. 막상 진지하게 고민해 보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렴풋이 난 또 혼자 오겠구나 싶었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굳이 유럽에 다시 와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관람 때는 좀 더 여유롭고 천천히 둘러봤고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하루에 한 곳만 가는 널널한 여행 일정이 허용해 준 여유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편안한 부처님의 미소. 돌은 대리석과는 다른 느낌으로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다. 결의 무늬가 아름다워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봤었다.
이중섭의 그림이 떠올랐던 옥 조각. 여러 각도로 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4명의 아이가 조각되어 있다. 퍼즐이나 평면의 착시현상을 3차원 조각 작품에 구현해 낸 것이 신기했다.
한국관과 대영박물관을 통틀어서 손에 꼽을만한 작품이었다. 점, 선, 면, 여백이 이토록 감동적인 줄 처음 알았다. 옆에 적힌 시와 같이 봐도, 따로 봐도 좋았다. 유리를 통해 여백 속에 비친 달 항아리도 색다른 묘미가 있었다.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마치 고요한 설원 같아서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에 앉아서 한참을 바라봤던 작품. 가까이에서 보면 시멘트 회벽 같은데 멀리서 보면 멋진 풍경이다. 과연 이것이 어떤 풍경이냐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흥미로운 흐름으로 감상했다.
1. 산
험준한 산맥, 까마득해서 까만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 처음엔 흐릿하고 끊길 듯하지만 어둠 속에서 회색으로 나아가면서 자신감을 얻고 퍼붓는다.
2. 절벽
세 가지 관점으로 하나의 풍경을 담은 중국의 삼원법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뒤에서부터 각각 평원, 앞에서 본 작은 산, 산 중의 절벽 폭포로도 볼 수 있다. 높은 곳의 안개와 절벽의 생생한 질감이 느껴진다.
3. 바위
바위가 물로 깨지는 순간이라면, 그래서 위에서 아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봐야 하는 하나의 돌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아 그림을 거꾸로 봤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나타났다. 해안과 갯벌, 폭포 그리고 동굴까지. 작품을 뒤집어보면 이렇게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p.s. 숙소의 장점 중 하나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영박물관 근처에 있는 유명한 서점 LONDON REVIEW에서 파친코 원서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