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대영박물관 The British Museum 1
아침 날씨는 서늘했다. 박물관은 처음엔 시원했으나 사람이 많아지니 후덥지근해졌다.
5시에 기상! 영국 온 지 이틀로 시차적응의 피로는 하나도 없었다. 아침으로 딸기와 청포도를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어제 극강의 더위를 경험한 뒤 새벽과 저녁에 움직이고 낮에는 실내에 머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해 영국은 140년 만의 폭염으로 한국에서도 뉴스가 났다.) 6시에 집을 나섰는데 공기가 시원해서 기분이 산뜻했다! 조금씩 길도 눈에 익는 중이다. 지하철엔 사람이 많아서 출근길에 합류한 기분이라 신기했다. Bond Street 역에서 Central Line으로 갈아탄 뒤 Totenham 역에서 내렸다. 6시 30분부터 영업하는 스타벅스에서 대영박물관 개장을 기다렸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기도 해서 9시 10분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개장 시간인 10시쯤엔 줄이 엄청 길어져서 미리 서 있길 잘했던 것 같다. 앞의 두 사람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줄 서기의 묘미란 그런 것이지만 난 배낭을 끌어안고 <샤를르와 룰라의 목요일>을 조금 읽었다. 기다리는 중 홈페이지에 입장 티켓이 있길래 급하게 예약했는데 확인도 안 했다. 심지어 나는 짐 검사도 그냥 통과했다. 그때 입력한 이메일 주소로 지금까지 대영박물관 전시 홍보 메일을 받고 있다. (정말 알 수 없는 영국 관광의 세계...)
어쨌든 술술 입장해서 지하 미로 같은 화장실에 들른 후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했다. 지도 놓고 방향 모르는 길치가 바로 나이기에 걱정했지만 일단 아무 데나 들어갔다. 처음 시작점을 기준으로 공간을 익혀가며 관람했다. 일단 가볍게 전시관을 한 바퀴를 돌고 그중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는 방식으로 둘러보려고 했는데 하나의 전시관이 너무 컸다. 결국 2개의 관을 겨우 돌고 지쳐버렸다. 점심을 먹은 뒤부터는 마음에 드는 작품은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 보는 식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사진은 내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잘 드러나는 구도로 찍고 다음에 전체샷, 제목-설명 캡션 순으로 찍었다. 단순히 기록용 사진보다 이 작품에 매료된 이유가 잘 드러나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찍을 작품도 신중하게 적은 개수로 골랐다. 유명한 것보다 내 마음이 끌리는 사적인 것을 담고자 한다.
표정이 너무 매력적! 사실적이냐를 떠나서 어떤 사람인지 딱 알 것 같다는 점에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너털웃음을 지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과 대걸레 머리도 잘 어울린다. 찰흙으로 빚어서 그런지 애니메이션 <윌리엄과 그로스>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오래된 작자 미상 작품을 마주할 때면 이 시대의 예술은 이미 존재하는 뭔가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기분이 든다.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Shy boy라고 생각했다. 돌의 색과 매끈한 듯하면서도 거 친면이 있는 질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양감 표현이 엄청나서 최소한의 선으로 음영과 입체감을 보여준다.. 앞에서 봤을 때와 측면에서 봤을 때 느낌이 다르다. 앞에서는 쑥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이라면 측면에서는 관세음보살처럼 인자한 얼굴이다. 정말 기가 센, 외유내강인 사람을 표현한 것 같다. 직접 스케치하면서 정말 선이 유려하고 예쁘다고 느꼈다. 특히 뒤에서 봤을 때의 곡선이 아름답다.
하마는 부귀와 건강, 생명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혼돈과 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금도 귀여운 이미지와 달리 매년 하마의 공격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하마 조각을 무덤 부장품으로 넣을 때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뜨려서 넣었다고 한다. 하마 가장이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도 하마의 익살스러움과 파괴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얼굴의 눈과 코, 달려 나갈 듯한 발을 보면 웃기다가도 뼈의 거북이들과 해골들을 보면 좀 섬찟해지기도 한다. 다양한 재료로 상반된 느낌을 잘 드러낸 것 같다.
가장 웅장하고 압도적이었던 작품. 밑에서 올려다본 입 속 모습이나 관절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발 그리고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갈기가 인상적이었다. CG나 다른 기술이 없었던 시대, 조각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예술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대 조각상 앞에 서면 그 에너지와 묵직함이 느껴진다.
단언컨대 대영박물관에서 제일 귀여운 사자다. 겁주기 위한 위압용 조각으로 제작했다면 실패가 아닐까. 묭묭거리면서 짖을 것 같은 느낌...
파여나간 부분의 양감이 두드러져서 좋았다. 얼굴 부분은 마치 순교자 같은 느낌이었고 그 안에 새로운 얼굴의 표정이 있는 것도 같다. 팔 부분은 날카롭게 잘려나가서 마치 날카로운 정으로 깎아낸 듯하다. 매끄러운 몸속의 살아 숨 쉬는 근육들이 느껴져서 훨씬 생동감. 살아있는 듯함이 와닿았다.
딱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던 조각품. 마치 하나인 것처럼 손과 발이 합쳐져 있지만 머리는 확실히 3개다.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개개인으로 존재하되 함께 살아가는 것. 조형적으로도 동근 곡선의 맛을 잘 살린 작품이라 보고 있는 내내 마음도 동글동글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라 새 같다...)
대형 사이즈의 도기를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한농의 <항아리>. 그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거대함, 압도감이 다시 생생하게 다가왔다. 문양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찾아보니 좀 다르다. 도기의 무늬는 장식적이고 화려하다면 한농의 <항아리> 무늬가 넉넉하고 단순한 느낌이다.
이건 작품 제목이 웃겼다. 아폴론 아님 말고 식. 사실 그냥 인간 조각인데 신으로 착각하거나 신으로 조각했는데 인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을까. 창작하는 사람 마음이니까. 사실 나도 처음에 보고 딱히 상징물이 없어서 그냥 사람 조각인 줄 알았다.
님프, 다프네 등 도망가는 신화의 인물들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아름다웠던 조각! 내 기준 대영 박물관 최고 미인이다. 작은 체구에 에너지가 가득 담겨있는 게 느껴진다. 정면보다 옆에서 바라보면 살짝 걷힌 치마가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정말 예쁘다. 사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든 새롭고 나름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달리는 한 순간을 포착해 낸 작품이라 그런 것 같다.
많이 닳은 모습임에도 얼굴에 설렘이 묻어나서 눈길이 갔다. 신, 숭배자라는 제목과 달리 '결혼실'이라는 제목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왠지 이 조각을 만드는 사람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가득했을 것 같다.
오페라 마술 피리 속 3명의 마녀가 떠올랐던 세 개의 두상 행렬. 왠지 모르게 사악해 보이는 미소. 그 당시에는 아름다운 미소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전시실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몸을 따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모아보니 약간 섬찟하다.
유럽의 부러운 점은 박물관에 대리석 조각이 아아주 많다는 것! 한국에서는 타일로만 보던 대리석이 수백 가지 모습으로 빛나고 있다. 햇빛을 받아서 정말 반짝거리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다. 반질반질하고 매끈거리는 질감 너무 좋다.
이상형을 만났다. 피그말리온 신화 어떻게 안 되나..? 심지어 얼굴을 망칠까 봐 스케치도 못하겠다. 조각으로 초상을 남기는 건 상당히 멋진 아이디어다. 근데 제목이 뭔가 가명으로 출연하는 소개팅 프로그램 소개 자막 같았다. 해리 (그리스 공무원, 28) 대충 이런 느낌ㅋㅋㅋ
어린 디오니소스, 전신 조각상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문득 이 서재에 조각상이 아닌 실제 누드모델들이 서 있어도 학구적이고 세련된 분위기가 유지될까 궁금해졌다.
개보다 개 같은 조각상. 마치 우리 집 강아지를 도촬 한 듯한 포즈부터 자연스러운 근육의 질감 표현까지 묘사적인 부분에 있어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박제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조각 작품이라 한참을 감탄하며 감상했다.
앞에서는 안간힘을 다해 플랭크를 하고 있고 뒤에서는 바들거리며 간신히 서 있다. 익살스러운 표정은 정말 귀엽지만 미안해서 뭔가 담기는 어려운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이색적인 배경에 앉아있으신 부처님이었다. 푸짐한 몸매와 미소가 이국적인 풍경도 단번에 고향처럼 만들어주셨다. 다음에 대영박물관에 가게 되었을 때도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 조형요소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언제나 새로움과 일종의 편안함을 준다! 세모로 이렇게나 멋진 풍경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첫날부터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지쳤다. 그리스 도기 & 대리석을 보는 게 너무 좋아서 폭주했는데 그 뒤로 Europe, Middle East, Asia 관까지 다 보려고 하다 보니 심각한 museum leg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피로)가 왔다. 핸드폰 배터리도, 내 체력도 방전된 상태로 터덜터덜 지하철 타고 환승했는데 통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분이 있었다. 지하에 베이스 음악과 색소폰 소리가 크게 울리는데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았다! 런던에 와서 오랜만에 듣는 음악이었다. 이어폰이 아닌 귀에 때려 박는 그런 음악이라 좋았다.
아트필러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