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적과 흑>
*이 글은 소설 <적과 흑>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왜 ‘적과 흑’일까? 주로 ‘적’은 나폴레옹 시대의 열정, ‘흑’은 왕정복고 시대의 암울함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나는 좀 색다른 접근을 해보려 한다. 이 글은 ‘사랑’이 이끌어가고 있다. 시대상, 쥘리앵의 생애는 모두 ‘사랑’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적과 흑이라는 제목이 사랑의 적과 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 레닐 부인
적의 사랑, 붉은색의 사랑은 레닐부인과의 사랑이다. 레닐 부인은 귀족부인이고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던 인물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쥘리앵을 만나고 나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남편이 그다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사랑의 열정과 함께, 동반되는 불안함, 슬픔 등 잊고 살았던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쥘리앵이 떠난 뒤 편지를 쓰가 결국 그 마음을 접지만 재회한 후 다시금 사랑하게 된다. 말 그대로 붉은, 열정적인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은 주변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잊고 있던 소증한 것들을 깨닫게 하며 그 불씨가 오래도록 남아 언제든 다시 불타오를 수 있는 그런 사랑이다.
# 마틸드
반면, 마틸드와의 사랑은 흑의 사랑, 검은색의 사랑이다. 마틸드는 쥘리앵을 사랑한다기보다 쥘리앵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이는 마틸드의 속마음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쥘리앵을 보면서 이렇게 독백한다. ‘하지만 과연 저 사람은 언제나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까?’ 쥘리앵을 알고 싶어 하기보다 자신에게 걸맞은 사람인지를 고민한다. 수많은 고민 후에 연인이 되었을 때도 그들은 겸연쩍음과 어색함을 느낀다. 작자는 ‘그들에게는 열정적인 사랑도 책에서 읽은 사랑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꼰다. 이후 마틸드는 쥘리앵에게 차갑게 대하다 열정을 불태우는 등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변화를 보여준다. 점점 쥘리앵보다 쥘리앵과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쥘리앵을 미칠 듯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고는 그에게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한다. 진정으로 마음을 준 적이 없었음에도 그녀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역할을 완벽히 해낸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쥘리앵의 질투 유발 작전에 말려들어 다시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되고 쥘리앵의 마지막을 함께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녀는 쥘리앵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구하려는 자신의 모습,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검은색, 그림자 같은 사랑인 것이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 연출한 연극의 조명에 비친 자기 자신의 그림자일 뿐이다.
# 그리고 쥘리앵
쥘리앵의 두 사랑에 대한 태도 역시 흥미롭다. 그는 상류층을 경멸한다. 그들의 삶과 인간성에 역겨움을 느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둘 다 상류층 여자다. 은연중에 그들을 경멸하면서도 신분 상승을 꿈꾸었던 그의 이중적인 마음이 드러난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굉장히 기묘하다. 그는 두 번 다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데, 처음에 그는 사랑을 ‘하나의 목표’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랑의 황홀함과 열정보다는 성취감과 피로감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의심하고 시험한다. 이것은 상류층에 대한 불신과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마침내 그는 사랑에 빠진다. 사실 쥘리앵이 더 큰 열정을 바친 사랑은 마틸드와의 사랑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훨씬 크고 깊게 비추어졌으며 아이까지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마틸드와의 사랑, 아니 그들의 동상이몽이 하나의 완벽한 연극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레닐부인을 본 뒤 감옥에서 깨닫는다. 마틸드를 보면서 ‘저렇게 열렬하게 나에게 애정을 바치고 있는데도 내가 이렇게 아무 느낌이 들지 않다니’라고 생각한다. 그제야 어렴풋이 그녀의 헌신적 행동이 자신과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분노에 차서 총을 쏜, 그러나 선처를 요구하고 있는 레닐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는 삶의 끝에서 쥘리앵이 적과 흑의 사랑을 직감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죽음에 대한 두 여인의 태도는 두 사랑의 극단, 결말을 보여준다. 레닐 부인은 쥘리앵의 약속을 지키고자 자살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흘 뒤 죽고 만다. 연인과 운명을 함께한 것이다.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 소멸되었다. 반면 마틸드는 자신의 연극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보니피스 드라골과 마그리트 드나벨의 이야기처럼 그녀는 쥘리앵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쥘리앵이 원했던 묘지를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다. 결국 끝까지 쥘리앵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연극으로 그녀는 자신이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과 자신이 실제로 사랑한 것은 달랐던 것이다. 그녀의 연극은 비극 같은 희극이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사랑은 완벽한 비극이다.
그렇다면 좀 더 나아가 이 둘의 사랑의 차이는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저 개인적 특성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스탕달은 이 사랑을 극명히 대조시키고 있다. 이는 곧 두 가지의 사랑이 일반화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랑의 경험’에 있다.
레닐 부인은 다양한 사랑을 직접 경험해 봤다. 아내로서의 사랑,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 데르보르 부인과의 친구와의 우정 등 그녀는 사랑을 겪어봤다. 쥘리앵과의 사랑은 그녀에게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의 사랑에 대한 경험으로 그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었고 자신이 이때까지 믿어왔던 사랑에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또한 그 사랑이 다른 사랑과 충돌해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아이의 병이 자신의 불순한 행동 때문이었다며 죄책감에 괴로워하지만 이내 그보다 쥘리앵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처럼 그녀가 현실에서 사랑을 겪어봤기에 쥘리앵과의 사랑을 더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젊은 아가씨 마틸드는 사랑을 글로 배운 인물이다. 소설과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설적인 사랑이야기만이 그녀가 배운 ‘사랑’이다. 여자가 혼인하기 전까지는 정숙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이 그녀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또한 그녀는 자존심이 매우 높아서 어느 남자도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 한다. 소설 속의 영웅적인 남성의 모습에 익숙한 그녀에게 현실의 남자들이 시시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소설 속 위기나 역경도 없이 편하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들이 어떤 매력이 있었겠는가? 쥘리앵의 낮은 신분 그러나 총명한 머리와 야심, 시니컬한 태도가 그녀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 흡사했고 결국 그녀의 상대역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올바른 가치관 없이 허상을 쫓던 그녀는 어쩌면 그 소설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로맨틱할 수 있었던 쥘리앵과의 사랑을 놓쳐버린 것이다.
스탕달이‘사랑’을 주제로 적과 흑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해석처럼 나폴레옹에 대한 생각, 다시 프랑스 사회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기 위해 쥘리앵과 그의 사랑을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그의 ‘사랑’에 대한 통찰은 명쾌하다. ‘사랑’을 배우는 이들에게 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사랑의 본질에 대해 잘 다루고 있으며 다른 작품들과 달리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은 언젠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틸드가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소설, 영화, 드라마 속 가상의 사랑에 갇혀 마틸드처럼 진실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을 때 충분히 사랑하고 행복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 배우고 경험해봐야 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보거나 읽거나 들으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랑이 과연 옳은지 성찰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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