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파리에서 안 변한 곳이 딱 한 곳 있죠. 일 센 루이예요.”
공항에서 나를 마레의 호텔까지 데려다준 리무진 기사님의 말이었다. 35년 전 스리랑카에서 일곱 살 때 부모님과 파리로 이민을 왔다고 한 그는 당시의 파리는 지금보다 훨씬 조용했다면서 그런 파리를 기억하는 나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은 안 가이드와 마레를 주야장천 돌아다니며 저녁까지 먹고 호텔로 들어와 정신없이 뻗었었다. 잠깐 잔듯했는데 눈을 뜨니 벌써 새벽. 시차 덕분에 더는 못 잘듯해서 아침이나 먹으려 일찌감치 호텔을 나섰다. 오전 일곱 시 반. 아직은 번잡스럽지 않은 시청 앞을 지나 아름다운 Pont d'Arcole (1854년에 연철로 지어진 최초의 다리)를 건너 시테섬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모두들 하루 장사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군데군데 레스토랑에서는 아침식사 손님을 받고 있었다.
“저기서 밥 먹으면 너무 좋겠다.“
아름답지만 재미없는 미국의 한적한 도시 포틀랜드에서 그것도 시내에서 산 쪽으로 삼십 분쯤 떨어진 숲 속에 사는 나에겐 아침에 도시를 걸으며 마음에 드는 빵집에 들어가 갓 구워낸 크로와상 하나와 커피 한잔의 아침은 항상 마음속 귀퉁이에 내재한 로망이다. 그러나 그 귀한 크로와상은 이 아저씨의 쟁반 위에서 눈으로 요기하는 걸로 끝. 아침 먹을 곳을 일찌감치 마음에 두고 온지라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번잡스러운 메인 스트릿을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니 너무나 예쁜 가게들과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 더 걸으니 역시나! 노트르담의 공사 현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크레인과 공사 트럭들, 헬멧을 쓰고 일하는 인부들이 조용한 주택가의 고요함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프랑스정부가 외부에 보이고 싶지 않은 현장이구나.”
고개를 들어 크레인을 쳐다보며 이 큰 성당이 화염에 삼켜지고 있을 때 가슴이 같이 타들어갔을 좁은 길 건너편에 사시던 이웃주민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도 모두들 정신이 나갔을 것이란 말이 모자라지 않았을까? 혼비백산은 둘째치고 발이 얼어붙어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불이 다 꺼지고 잿더미만 남은 노트르담은 모습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이상으로 참담한 마음이었겠지..
공사 중인 성당옆 기념품 가게들은 문을 안 열어서인지 조용했고 마치 개점휴업상태 같이 보였다. 그래도 공사장 앞의 샌드위치샵은 벌써 아침 손님을 받고 있었다.
시테섬과 나란히 위치한 루이섬으로 들어서려니 어디선가 색소폰 연주 소리가 들린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강가 벤치에서 젊은 청년하나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하는 것을 보니 연습을 하는 듯싶었다.
일 센 루이 (루이 섬)는 십오 년도 더 전,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당시 살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연말 여행으로 떠나와 이 섬의 한 아파트를 렌트해 가족 셋이 일주일을 지낸 곳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아들이 파리 여행을 얼씨구나 좋아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철없던 부모가 사고를 친 것이었다. 다행히 본인이 원하던 학교에는 들어갔지만 그때 심신이 힘들던 아이는 도착한 날부터 며칠을 정신없이 자기만 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의 머릿속에 정겹게 남아있는 기억 하나는 매일 아침 온 동네를 에워싸던 고소한 빵 굽는 냄새였다. 새벽마다 마치 동화의 나라에 와있는 착각이 들게 했던 그 빵 굽는 냄새는 오전 세 시 반이면 바로 한 블록 건너에 위치한 빵집의 오븐에서 피어나기 시작해서 17세기에 지어진 그곳 아파트 지붕들을 타고 우리 숙소를 거쳐 온 동네를 에워싸곤 했었다. 나는 이른 아침마다 장바구니 겸 캔버스 백을 들고 빵집으로 마실 가서 불어만 하시던 빵집 아저씨에게서 막 구워낸 바삭바삭한 바게트를 나만의 수화와 몇 마디의 불어를 섞어 익숙하게 사들고 바로 건너편 그로서리로 가서 우유와 커피, 싱싱한 야채, 과일 등 맛있는 먹거리를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 왔다. 그렇게 육박 칠일 일 센 루이의 삶이 시작되곤 했다.
마레에서의 첫날 아침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다시 한번 같은 빵집을 찾아 그 아저씨의 맛있던 빵을 맛보고 싶었다.
봉주르~
봉주르~
혹시나 그 아저씨가 있을까 하는 마음은 아주 잠깐. 빵집의 주인은 이십 대의 청년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아저씨의 아들이라면서 자기 아버지는 오후에 출근하신다 하였다. 그 양반 역시 나랑 비슷한 연세이실 거라…
빵집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곳에는 옛날처럼 나의 허기진 배를 달콤하게 채워주던 맛있는 바게트나 아저씨의 특기였던, 독일식의 흑빵은 더 이상 없었다. 아저씨는 건건이가 많이 들어간 까만색의 묵직한 빵을 내가 원하는 두께로 길게 썰어서 내어 주곤 했다. 그 빵을 숙소에 가져와 그로서리에서 사 온 수프를 데워 점심으로 다 같이 먹곤 했는데 다들 너무나 맛있다고 탄성을 지르곤 했었다. 남편과 아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 빵집의 추억은 사소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것들이었다.
칼로 잘라주던 흑빵 대신 진열대에 나와있던 버섯 키쉬 (Mushroom Quiche)를 골랐더니 아드님이 마이크로 오븐에 데워 주었다. 아마도 전날 만들어 놓은 듯했지만 맛은 괜찮았다. 더불어 아메리카노도 한잔 마시고 도합 7유로를 지불하고 베이커리를 나와 건너편 그로서리에 들어갔다. 그곳의 주인아저씨는 그 옛날의 주인 같아 보였는데 뜬금없이 나더러 일본사람이냐 중국사람이냐 묻는다. 나는 웃으면서 둘 다 틀렸고 미국 사는 한국인이다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자기 부인도 한국인이란다. 내 대답은 결혼 잘하셨네요. 그 말에 아저씨는 정말 맞다고 하며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는다.
그로서리를 나와 일 센 루이의 메인 스트리트를 위아래로 죄다 훑었다. 그곳에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새로 생긴 가게들이 반, 옛날 그대로의 가게들이 반 정도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그 옛날에 모자를 샀던, 여전히 모자를 파는 상점도 여전히 영업 중 있었고 칼라풀한 디자인 오브제 같던 일본풍의 플라스틱 그릇을 팔던 곳도, 가게가 온통 치즈로 뒤덮인 치즈 가게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맛있는 잼을 팔던 가게는 팬시한 오르가닉 그로서리로 변신하였고 밤마다 흥청대던 술집은 달콤한 캔디 가게로 바뀌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항상 문이 닫혀 있던 마리오넷 인형을 팔던 가게는 여전히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여전히 마리오넷 인형이 진열되어 있었다. (첫 번째 사진)
일 센 루이는 며칠 후 일요일 아침에 아들이 운영하는 삥집에 아침을 먹으러 또 갔었다. 그날은 마레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다른 곳도 둘러볼 요량으로 메인 스트릿을 관통해서 남쪽으로 연결된 Pont de Sulley를 건너 마레로 들어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위치한 동네 성당인 Église Saint-Louis church에도 처음 들어가서 괜히 미사시간 전에 예배드리러 온 사람처럼 여기저기 둘러도 보았다.
성당을 나와 걸어가는데 갑자기 교회의 종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딩동 뎅동 딩동 뎅동….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들려오는 교회의 높은 종탑을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변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왔던 일 센 루이에서 진짜 변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처음 듣는 저 종소리 같았다. 일요일 아침 한적한 메인 스트릿에 울려 퍼지는 오래된 성당의 종소리. 성당으로 향하는 신도들의 발걸음. 성당 안에서 미사를 기다리던 어린 복사들.
다음에 파리에 올 땐 빵 굽는 냄새대신 이 종소리를 들으러 루이 섬에 또 빨려 들어올 것 같았다.
변하지 않는 마법 속의 파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