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패션모델
이년이 넘게 여러 모델의 촬영을 하다 보니 이젠 그 친구 이름이 뭐였지? 하는 때가 다반사다. 그러나 나의 첫 모델은 이름뿐 아니라 그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사진같이 기억하고 있다.
나의 첫 번째 모델의 이름은 A, 스웨덴 출신, 당시 19살. 키가 182cm쯤 되는 전형적인 북구 미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를 가려다 밀란에 와서 모델이 되었다고 했다. 꿈이 샤넬쇼에 나가는 것 같은데 당시가 커리어의 시작인 듯했다. 요즘도 가끔씩 인스타에 포스팅이 올라오는데 아직 모델을 하고 있구나, 꿈을 빨리 이루면 좋겠다 생각한다.
세이지: “누가 먼저 찍을래요? M?” (who’s the first? M?)
나: “아이고… 아니요.“ (Oh, No!”)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담날 아침, 내 생애 처음이었던 패션모델 촬영은 그렇게 36계 줄행랑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는 라 스칼라 앞에서)
우리들은 촬영 당일 아침 9시에 밀란 라이카스토어에 모두 집합했다. 여기서 세이지는 그날의 스케줄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과제물을 내주었다. 자세한 스케줄과 미팅 장소는 그녀가 보낸 이멜에 들어 있었고 참가자들은 whatsapp으로 서로 간의 소통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앱은 유럽에 나갈 때는 반드시 다운로드를 해야 되는 것으로 공항에서 리무진 서비스를 받을 때 기사와 소통을 위해서 필수였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한 번도 쓴 일이 없었다.)
1. 한 씬당 2-5장의 사진을 추려서 존이 만들어 놓은 공동으로 셰어 하는 드롭박스에 들어있는 개개인의 폴더에 업로드할 것
2. 첫날은 모델 한 명으로 3 씬 (모델이 의상을 바꾸며 나오는 숫자) 도합 6-15장의 괜찮은 사진을 찍어 올릴 것
3. 각자는 씬당 5분간의 촬영이 허락됨.
4. 그날의 사진들을 추려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제출할 것
전체 촬영 스태프들은 실제 패션화보를 찍을 때와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밀라노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A는 모델의 패션을 책임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실제로 밀란 패션계의 유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그녀의 지휘 아래 베테랑 헤어, 메이크업, 의상 담당 디렉터 등 거의 열 명의 인원이 우리와 일주일을 같이 하였다. 세이지는 마크와 협조하여 밀란의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원하는 모델들을 섭외하여 라인업을 시켜 놓았다. (여기까지는 회사 다닐 때 다 해보아서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프로페셔널하게 진행한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그러나 정작 사진을 찍어야 할 우리는 어떻게 생긴 모델이 무슨 옷을 입고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몰랐다. 워낙 필드에서 일하는 사진사들은 뭘 찍는지도 모르고 자기 기어만 준비하여 나타난다고 하며 우리도 같은 조건에서 촬영한다고 하였다.
“아이고오…. 난, 망했다.“
그날 나의 솔직한 심정. 대충 노는 줄 알고 왔다가 사진 찍는 데에서 완전히 걸려든 셈이었다. 이걸 요즘 말로 낚인다 하는 것 같은데 진짜로 되게 세게 낚였다. 사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라 스칼라좌 앞 길거리에 처음 A가 나타났을 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들 다 같이… 그녀는 정말 예뻤다. 여자인 내가 그랬으니 남자들은 어땠을까 싶다. D의 말처럼 나 역시 엄청 긴장했었다.
저렇게 이쁜데 잘 찍어야지.
첫 번째로는 안 하겠다고 도망은 갔지만 그래도 일은 일! 걱정하고 징징거릴 틈이 없었다. 세이지가 내 순서를 뒤로 밀어준 동안 나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무슨 배경으로 뭘 어떻게 찍을까 한참을 궁리했다.
내 차례가 왔고 나에게 허락된 오분은 길지 않았고 세이지나 존이 가지고 있던 스톱워치는 사정없이 돌아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첫 촬영은 끝.
두 번째는 Galleria Vittorio Emanuele II에서 (나에겐 도저히 발음이 안 되는 장소)
A가 다음 신을 준비하러 미국서 온 스태프들의 에어비앤비 아파트로 돌아간 동안 우리는 쇼핑몰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그녀와 크루들을 기다렸다. 갤러리아 쇼핑몰은 가히 누구네 궁전 같아서 생각 같아서는 정신 놓고 커피 한잔을 여유 있게 마시고 싶었지만 난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음 씬은 어떻게 꾸려나갈지 생각하느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곳은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처음은 코비드전 한국에서 왔던 대학 후배와, 그녀의 영국에서 유학하던 딸내미, 그리고 미국서 갔던 나, 이렇게 3개 대륙에서 모인 한국여자 세 명이 이태리에서 만나 여러 곳을 여행하다 마지막에 들렸었다. 그때는 밀란에 갔던 이유가 관광 겸 밀란 디자인 쇼를 참관하는 게 메인으로 첫날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관람했고 라스칼라에서 정신없이 졸면서 발레도 보고 둘째 날은 디자인 위크 기간이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디자인용품 및 멋진 가구 등등을 구경하며 감탄하며 신나 하며 돌아다녔었다. 그로부터 삼 년 후에 내가 그곳에서 패션사진을 촬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막상 패션 화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눈에 들어오는 게 그렇게 다른지. 이번엔 옷이랑 장신구, 머천다이징 등이 특이한 옷가게들에만 시선이 갔다.
“무슨 스토리로 짜야하지?“
“아이고… 골 때려…”
이때만 해도 사진의 구도나 색감, 그리고 초점 맞추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스토리까지 들어가야 한다니 뭣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게다가 마크가 우리에게 샘플로 보여주는 본인의 사진들은 도저히 스토리가 있는 사진으로 안 보여서 더 헤매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모델의 얼굴이나 바디를 중심으로 주위의 배경들은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것들이었는데 (이걸 보케라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헐!) 도대체 그 안에 무슨 스토리가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나는 내 방식으로 직진! 생각이고 뭐고 할 여유가 없었다.
두 번째 스토리로 Galleria Vittorio Emanuele II에서 길거리에서 멋진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는 그녀를 스토리의 주제로 찍었다.
근처의 공원에서 찍은 세 번째 스토리: 타조 깃털이 달린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데이트하러 나가는 그녀의 촬영
마침 길거리에 이런 예쁜 전동 킥보드가 있어서 프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마크는 저 친구 뭐 하는 거지? 하였으리라. ㅎㅎㅎ 이제야 웃음이 난다.
지금에 와서 옛날 사진들을 다시 꺼내보니 참 한심하기 그지없다. 깊이도 하나 없는 이야기는 일열로 나래비를 세운 것 같이 너무 단순했고 사진들 역시 값싼 메거진에 나오는 특별한 것 하나도 없는 평범한 이미지들 뿐이다. 요즘에서야 X튜브에서 보았던 봉준호 감독이 온 힘을 다해서 짜는 시나리오 스토리보드 제작 과정이 쬐곰 눈에 들어오는데 그때는 그런 게 어떤 것인지 감도 못 잡았었다. 그런데도 창피를 무릅쓰고 보이는 이유는 여기가 나의 출발선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