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에서 와이드오픈이란 렌즈의 조리개를 완전히 끝까지 열어 놓은 상태를 말한다. 렌즈 열림의 최대 오픈 수치는 각각의 제품에 따라 다른데 보통은 F4-6 정도로 알고 있고 나의 라이카 CL에 딸려온 TL 렌즈의 경우 F3.5, 라이카 Summilux 렌즈군의 경우 F1.4가 주류이고, Summacron의 경우 플러스마이너스 F2.0, 현재 내가 애용하는 Noctilux경우는 F1.2이지만 F1.25, F.95나 F1.0도 있다. 조리개를 얼마나 오픈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그 작동 가능성에 따라 내가 찍는 이미지의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위의 오른쪽 사진은 F16이고 왼쪽 사진은 F1.4로 찍었다. 초점은 프레임 가운데 아래에 위치한 작은 나짐(모로코식 뚝배기라면 되겠다) 모형에 맞추었는데 뒷배경의 아들의 사진 모습이 F16일 때는 확실히 보이나 F1.4일 때는 누구의 얼굴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나온다. 왼쪽의 사진이 와이드오픈을 한 경우이고 오른쪽 사진이 조리개를 바짝 조인 경우가 된다.
이와 같이 렌즈의 와이드오픈 수치가 작아질수록 조리개가 많이 열리기 때문에 와이드오픈을 해서 얼굴을 1미터 정도 앞에서 찍으면 코가 초점에 맞으면 눈이 안 맞고 얼굴을 약간만 비스듬히 해서 찍으면 두 눈의 초점이 하나만 맞는 식이 된다. 그런 이유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상업사진가들은 이 방법을 잘 쓰지 않았으나 누구나 핸드폰을 사용해서 웬만한 사진을 찍는 요즘에 들어서는 역으로 이미지의 차별화를 위해 점점 더 많은 패션 에디토리얼 사진들이 이 기법을 사용한다.
내가 와이드오픈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크 때문이었다. 와이드오픈과 초점을 맞추고 안 맞추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지만 사람 눈동자의 경우 눈의 동공을 많이 열면 초점 맞추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크가 나를 밀란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초점을 안 맞춰도 좋으니 느낀 그대로 그냥 찍으라고 했을 뿐 와이드오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고 나는 렌즈를 많이 열고 닫으면 그림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감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 ”점프“ 글에서 소개한 프라다파운데이션에서 찍은 “플로팅 테이블: Floating Table” 이후로 열심히 초점이 안 맞는 사진을 찍어보려고는 했지만 웬일인지 몰라도 초점이 안 맞는다고 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되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밀란에서 돌아온 후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흥분된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사라져 갔고 여기저기, 하나씩, 둘씩, 셋씩,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저럴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의 양은 늘어만 가서, 더 이상 기억에 의존할 수 없을 때 즈음, 나는 생각이 날 때마다 공책에 하나씩 두 개씩 궁금한 점들을 적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곤 두 달쯤 되어가니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 더 이상 사진을 찍기 힘들게 되었다. 일찌감치 잡아놓았던 마크와의 다음 수업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2022년 12월. 마크와 밀란에서 처음 만난 후 딱 두 달 만에 나는 우리 집이 있는 오레곤의 포틀랜드에서 비행기를 두 시간이나 타고 가 엘에이의 웨스트 할리우드에 위치한 라이카스토어에서 마크와 세이지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이번에는 나를 보더니 팔을 벌리고 반갑게 허그를 하자한다.
“아하, 이것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의 차이구나.” 그리고 나도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먹했던 마음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라이카엘에이 스토어는 독일 라이카 본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영점으로 미국의 웨스코스트에서는 가장 큰 장소이다. 이곳은 브랜드의 플래그쉽 스토어답게 일층에는 넓은 리테일매장이 위치해 있고 이층에는 더 널찍한 사진 갤러리와 그에 연결된 워크숍을 위한 클래스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원온원 수업은 이층에 위치한 갤러리 바로 옆의 발코니에서 시작되었다. 커나란 소파에 마주 앉아서,
마크: ”그동안 잘 있었어?“
나: ” 네, 당신은요?“
마크: ”바빴지만 잘 지냈지.“
대충 이렇게 얘기를 시작해서 한 시간 정도 그와 잡담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래 세 시간짜리 개인 수업의 경우 한 시간은 대화로, 두 시간은 모델과의 사진 찍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잡담 같은 한 시간이 지나자 우리의 모델이 나타났다. 그녀의 이름은 P. 모델답게 180cm가 훨씬 넘는 늘씬한 키에 약간은 중동의 분위기가 풍기는 삼십 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직업 모델로 마크의 여섯 명 정도 되는 누드모델 중 하나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고 그녀는 패션모델이 아니라 연기를 할 수 있는 아트모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와 슈팅 세션에 들어가면서 마크는 나에게 렌즈의 조리개를 완전히 열고, 초점은 가장 가깝게 고정하고 ISO도 하나로 고정하고 셔터스피드 다이얼만 움직이면서 빛을 양을 조절하여 찍으라 했다. 나는 Summilux 렌즈의 최대치인 F1.4, 거리 1미터, ISO는 100으로 고정하였고 셔터는 빛이 잘 드는 발코니의 그늘이라 1/250-1/2500초의 범위에서 셔터를 누른 것 같다. 마크는 초점을 렌즈를 움직여 조절하지 말고 내 몸을 움직여 카메라를 대상에서 가까이 또는 멀게 하며 자연스럽게 초점을 맞추라 주문했다.
레디, 슛, 고우.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P,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번엔 여기 앉아서 내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고, 저쪽을 보고, 편안히, 천천히 움직이세요…“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
.
.
.
그렇게 한 삼십 분쯤 찍었을까? 마크가 세이지에게 P의 의상을 바꾸어 보자고 한다.
잠깐의 시간 동안 숨을 고르며 또다시 촬영시작.
슈팅 반복. 이번은 자리를 실내로 옮겨서 같은 식으로 슈팅….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참 이상했던 것이 이렇게 촬영을 하면서 나는 초점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모델의 모습이나 그녀의 감정을 포착하는 데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감정의 포착도 그냥 웃는 모습이나 슬픈 표정이 아니라 그녀의 깊은 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P는 연륜 있는 아티스트답게 팔색조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데 아무 주저함도 어색함도 없었으며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마치 두 사람의 재즈뮤지션이 된 듯 그녀가 새로운 포즈를 취하면 나는 셔터를 누르고 또 새로운 포즈를 만들면 또 셔터를 누르고 하는 동작을 박자에 맞추어 이어가면서 서로 완전히 몰입하며 사진을 찍었다.
한 번도 재즈 음악을 연주해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마치 나와 그녀가 새로운 음악을 즉흥적으로 만들어가는 즐거운 연주를 하고 있다는 감정이 슈팅 내내 들았다. 사진을 찍으며 처음 느껴보는 희열의 순간들이었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너무나 집중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재미있었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재즈 뮤지션이었다면 아마도 마스터피스를 연주했을 때의 기분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나는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며 드디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촬영을 다 끝내고 카메라를 가방에 주섬주섬 집어넣는 나를 보고 마크와 세이지는 집에 가서 오늘 찍은 사진을 에디팅 해서 자기들에게 이멜로 보내라 한다. 그리고 줌미팅을 통해 같이 리뷰를 하는 걸로 클래스를 마감한다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몇백 장 정도의 사진을 다 살피고, 추리고 추리고 나니 아래의 두 장의 사진이 골라졌다. 그 아래 두장은 세컨드초이스들. 거의 원본 그대로의 모습이고 트리밍이나 고친 점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P의 당시 모습을 담았다. 그렇다고 초점이 쌈빡하게 맞지도 않지만 나는 이대로의 부드러운, 약간은 몽환적인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내가 첨부터 원했던 사진에서의 “catching the fleeting moment” (흐르는 시간을 잡는 것)를 이 사진에서 이루고 있는 듯했다. 또한 첫 번 째 점프가 거의 우연이었다면 이번은 정신 차리고 뛰어내린 두 번째 점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카메라에 통째로 잡힌 그녀의 모습, 그녀의 내면, 당시의 분위기…
이런 점이 와이드오픈을 하는 이유였다.
기어 인포:
라이카 Summilux M 35mm ASPH F1.4 + LeicaM10R
Adobe Photo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