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밀란에서 패션포토워크숍을 하고 칠 개월쯤 지난 2023년 오월 뉴욕 맨해튼에서 또 하나의 패션포토워크숍에 참가하였다. 이번은 그룹이 같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참가자들이 대부분 뉴욕 거주자들이라 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나만 다운타운 호텔에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워크숍에 임하였다. 모델이나 헤어, 메이크업 담당자들이 모두 뉴욕 베이스였고 하나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모델들의 의상과 모든 비주얼을 지난번 밀란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일을 맡아준 E가 뉴욕까지 날아와 지휘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처음 이틀간의 의상들을 책임졌고 셋째 날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인도 디자이너를 세이지가 직접 섭외해 구슬이 엄청나게 많이 달린 값비싼 이브닝드레스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구슬이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모델은 의자에 못 앉을 거니 그리 알고 있으라는 문자를 받았다. 오른쪽은 의상들)
밀란 이후로 두 번째 찍게 된 패션 사진 워크숍은 처음과는 조금 달랐다. 당시는 사전 심사라는 것이 없이 누구나 신청하고 돈만 내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번엔 그쪽에서 원하는 서류를 먼저내면 심사를 해서 입학시키겠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이십 년 넘게 묵혀 두었던 나의 이력서를 펼쳐 들고 150자 내외의 구술식으로 고쳐 써야 했고, 이제껏 찍었던 사진들을 죄다 추려 20장 남짓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냈고, 왜 내가 이 수업에 참가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취지의 글을 써 보냈다. 다행히 심사는 통과.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전에 열렸던 포르토에서의 워크숍 중 참가자들 중 한 명이 이상한 행동을 해대서 다들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한 사람의 생각 없는 모난 행동이 큰돈 들여 배우러 갔던 여러 사람들을 심히 불편하게 하였으니 주최 측으로도 난감했을 성싶었다. 마크와 세이지는 그런 경험이 두 번째여서 라이카아카데미 측과 의논한 결과 뉴욕 워크숍은 라이카아카데미로서는 처음으로 사전 심사제를 도입하였다 한다. 일종의 대학교 수업과 마찬가지로 일 학년 때 “한국역사 100”을 들어야 이 학년 때 “한국역사 200”을 들을 수 있는 것 같은 시스템이다. 마치 내가 “인물사진 100”을 듣고 이제 “인물사진 200”을 듣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제야 쌩 초짜는 면하는 것일까?”
난 포르토 워크숍이 나의 한국 여행과 겹쳐서 참석을 못했는데 속으로는 “그곳에 안 가서 천만다행이다”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사전 심사제는 이제 라이카의 거의 모든 마스터클래스들에 적용된다. 마크를 포함한 일부 유명한 선생들은 자신들의 프라이빗한 롤러덱스에 가입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본인들의 워크숍 일정을 먼저 알리고 참가를 유도한 후 나머지 빈자리에 한해 오프닝이 몇 개 있다 하는 식으로 공모를 띄운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이 조그만 사진 세계에도 적용되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은 마찬가지라 미국이란 나라에서도 평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바워리호텔에서 다음 촬영을 기다리는 모습, 90mm 녹티를 든 H)
그렇게 해서 모였던 참가자들은 남자 세 명 여자로는 나와 파슨스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갓 졸업한 A가 함께했다. 장학생인 그녀를 포함한 참가자 다섯 명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대표적인 사진 한 장을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내보이며 본인 소개를 시작했다.
G: 멕시코 출신의 현직 국제법 변호사. 184cm 정도의 훤칠한 키에 사진을 찍은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온갖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멀티플레이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우리의 슈팅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사이드로 2-3개의 토픽으로 전혀 다른 사진들을 찍으셔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슈팅 장면들도 남길 수 있었는데 그는 이에 더해 거리 데모등 근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진으로 담아두었다. 솔직히 난 다음 촬영을 준비하느라 머라가 너무 복잡해 도저히 딴생각은 하기 어려웠는데 이 양반은 머리와 힘이 남아나서 마크의 촬영은 별 부담이 안 되는 듯싶었다.
H: 브라질 출신의 전직 애플컴퓨터사의 프로덕트디자이너. 잘 나가던 자사 주식으로 일찌감치 편안하게 은퇴하신 분 역시 184cm는 넘어 보이는 장신의 거구였는데 그 무겁다고 소문난 녹틸러스 90mm 렌즈를 천사 날개같이 가비얍게 들고 다녀서 내가 몹시 부러워했다. (위의 사진 오른쪽) 얼마 전에 그보다 가벼운 녹틸러스 75mm 렌즈를 내 남편이 샀는데 1kg이 조히 넘는 무게라 난 들고 다니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이럴 때 보면 장신에 거구인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J: 밀란에 같이 갔었던 나의 멘토이자 믿을만한 친구. 당시 이 아저씨는 95세가 훨씬 넘은 어머님이 이틀 전에 돌아가셔서 상중이었지만 슈팅에는 모두 참석하셨다. 미국은 한국같이 삼일장 오일장 이런 것이 없어서 누가 돌아가시면 장례사에 시신을 맡겨 냉동한 채로 보관한 뒤 모두가 쉽게 모일 수 있는 다가오는 주말을 끼워 장례를 치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틀 전 어머니를 잃은 그의 모습은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았다. 예를 들어 카메라는 비서에게 말해서 석대를 다 가져왔지만 카메라 배터리는 죄다 놓고 와서 나와 함께 본인의 다운타운 사무실 겸 스튜디오로 가서 가져왔다. 세이지는 그가 혼자 갔다간 길을 잃고 못 돌아올까 봐 걱정했는데 내가 따라간다고 하니 허락했다고 하였다. 난 덕분에 말로만 듣던 맨해튼 메디슨애브뉴의 사무실을 직접 구경할 수 있었다. 그냥 사무실이었다.
(내 친구이며 멘토인 J 와 촬영하는 우리의 모델이었던 M. 무척 아름다운 사진으로 멀티플레이어 G가 찍었다.)
A: 이름을 밝히지 않은 참가자 중 한 명이 기부한 장학생으로 참가했던 파슨스 사진학과 졸업생. 유명한 사진작가 Louis Sttetner의 손녀이며 학교 졸업 후 뉴욕에서 여러 가지 알바로 씩씩하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다국적의 삼개 국어에 능통한 아가씨. 사진학과 출신인데도 마치 생전처음 프로 패션모델을 찍는 듯 엄청 긴장했었다. 젊은 친구가 예의도 바르고 싹싹해서 주위의 우리 같은 노땅들이 딸같이 많이 살펴주었는데 한 번은 그 비싼 라이카 카메라를 석대나 어깨에 메고 나타나서 웬일이냐고 했더니 아저씨들이 죄다 빌려준 것이라며 머쓱해하며 웃었다. 워크숍이 끝나갈 무렵엔 상황에 거의 익숙해져 모델들과 소통도 잘하고 나름 선수의 바이브도 보였다.
(선생과는 세 번째 작업이라 훨씬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아주 가까이는 아니다. 오른쪽의 간격이 딱 편안했다.)
어느 젊은 사진사의 말처럼 비싼 카메라 바디나 렌즈하나 살 돈으로 워크숍 듣는 게 ROI가 훨씬 낫다는 말, 실감하고 동의한다. 인간의 역사가 전대에서 후대로 입과 문자로 발전해 온 것처럼, 우리는 선수가 된 전대의 베테랑들에게서 직접 사사받을때 제일 빨리 배운다. 세상사가 다 그래서 난 나의 멘토가 되어준 J가 정말 고맙다.
(무드보드)
이번의 워크숍에서는 세이지가 갑자기 무드보드(mood board)를 제출하란다. 설명인즉슨, 자기들이 클라이언트인 회사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에게서 프로젝트를 따내려면 그 일에 대한 아이디어를 사진 등을 포함한 비주얼 이미지로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솔직히 “이게 웬 말?” 그런 디자인 디렉션은 내가 실무에 있을 때 아트디렉터인 내 몫이었지 한 번도 내 사진사에게 아이디어를 내 달라고 한 적이 없어서였다. 그건 일종의 내 벤더의 아이디어를 아무 대가 없이 훔치는 cheating이 아닌가? 했더니, 세이지는 그게 트렌드라서 방법이 없다고 하고 마크는 내 말이 맞다고 한다. 하긴 예전에 이베이의 아트디렉터 자리에 이력서를 냈더니 똑같은 얘기를 해서 내 아이디어를 공짜로 가져갈 생각을 마시오 하며 이력서를 뺏어온 적이 있었다. 내가 일하던 오라클에서는 큰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다수의 디자인사무실에 공모요청을 보내면서 첫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대가로 삼십 년 전 당시 오천 불씩 준 기억이 있는데 그걸 공짜로 받겠다는 심보가 어이가 없어서다. 세상이 참으로 삭막해졌구나 싶었고 개나 소나 아트디렉터도 아닌 크리에이티브디랙터라 명함을 내밀면서 머릿속에 든 것은 없으니 괜한 벤더의 머리를 삥땅하고 있구나 싶어 세이지에게 그건 안 하겠노라 버텼다.
(봄의 제전 클립 아트들)
하지만 그녀의 그 말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는 일찌감치 스토리가 싹트고 있었고 (촬영 전부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나는 밀란에서와는 달리 미리 주제를 가지고 준비된 상태로 촬영에 임했다. 아주 큰 차이였다.
마침 당시는 봄이었고 대부분의 촬영이 이루어진 곳은 찬란한 봄이 아우성치던 센트럴 파크와 소호 그리고 문을 연지 이십 년쯤 되었지만 생기기는 백 년쯤 되어 보이는 소호의 유명한 셀럽 호텔인 바워리(Bowery)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마침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바슬라브 니진스키의 안무로 처음 선보였던 그러나 상당히 독창적인 발레 덕분에 왕창 욕을 먹었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이 파리에서 초연된 지 딱 백 년째 되는 해였다.
나는 안 하겠다고 버텼던 그노무 무드보드는 사진촬영을 다 하고 나서야 세이지에게 보냈다. 결말까지 다 하고 나서야 서막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 것이다. 그때는 형식만 차리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보석을 만들려고 해도 구슬이 필요한 것처럼 얼마 전 뉴욕에서 만났던 지금은 크리에이티브디렉터가 된 D가 자신의 무드보드를 보여줄 때 이게 뭔 의미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 무식을 면했다. 논리적으로는 안 맞더라도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뭐라도 꿸 수 있다는 것을 이년이 꼬박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바워리 호텔과 그곳에서 본 로우맨해튼의 모습. 이곳은 고층빌딩의 삐까번쩍한 마천루가 아닌 낮은 벽돌건물들이 이어진 이전세기의 뉴욕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마지막은 G가 찍은 나의 모습.
기어 인포:
라이카 Summilux M 35mm ASPH F1.4 + LeicaM10R i
Phone 14: 호텔 방에서 내려다 본 소호의 이미지들
editting software: Adobe Photo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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