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의 순조로왔던 야외 촬영을 마치고 셋째 날은 소호에 위치한 부티크 호텔이며 셀럽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한 바워리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실내 촬영이었다. 이곳은 내가 포인트를 적립하고자 맨날 가는 프랜차이즈호텔이 아닌 너무나 다른 아주 유니크한 부티크 호텔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찐한 유럽분위기에 바이브부터 뭔가 다른 것이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좀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전날 세이지와 마크와 프로그램의 AD로도 활약하고 있는 최연소 장학생과 함께 짐을 옮기려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다르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날 가 보았던 바워리 호텔 방 안의 모습은 나에게 걱정이 소록소록 샘솟게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여기 웬 창문이 이리 많아?” - 코너방이었고(호텔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스튜디오 스위트룸이라는 것으로 하루에 $1400이라고) 연결된 두 개의 벽이 조그만 사각형으로 바둑판처럼 나누어진 프렌치 윈도였다.
“ 근데 죄다 까만색 창틀이네?” - 이건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모델의 머리뒤가 모두 시꺼먼 격자무늬가 될 거라…
“ 아니,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둔 벽이 하나도 없잖아?” - 그렇다고 다른 벽들이 깨끗한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그림액자에, 벽조명등에, 조금씩 왁자지껄해 보이는 장식들이 붙어있었다. 이걸 턴오브 더센트리 유럽피안스톼일 (turn of the centry European Style)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그냥 파리의 마레나 몽마르트르에 가면 널리고 널린 오래된, 조금은 낡아빠진 호텔의 모습이라 해야 하나? 그래도 침대시트나 린넨들은 깨끗한 하얀색의 고급진 제품이란 것이 확실해 보여 비싼 호텔이란 분위기는 나름 풍기고 있었다.
“진짜 큰일 났구나.” - 난 인물의 배경이 단색인 것을 선호한다. 그래야 시선이 인물에 자연스럽게 머무르게 되니까.
사진설명: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프렌치윈도와 그녀의 전위적인 헤어스타일
담날 아침, 세이지는 호텔로비에 모인 우리에게 심각한 얼굴로 겁을 주며 당부를 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호텔의 안전 규정상 방안에 들어있는 사람수가 정해져 있으니 한 사람씩 방으로 올라와서 오 분 동안 사진만 찍고 내려가라. 각자의 촬영 시간은 이멜로 보냈으니 잘 명심해서 오 분 전에 미리 올라와 (딱 오 분 전, 더도 덜도 늦지 말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방문을 열면 그전까지 찍고 있던 사람이 나가고 다음 사람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일인당 촬영시간은 오분이다. 잘 명심하도록.” - 이 친구가 가끔 우리에게 협박조로 심각하게 얘기할 때는 아무도 말하지는 않지만 약간들 기가 찬 멍한 표정을 짓는다. 다들 밖에 나가면 한가닥씩 하는 멀쩡한 어른들인데 서른 살도 안된 친구에게 어린이 같은 취급을 받고 있으니… 그래도 이해. 사고 나면 책일질 사람은 마크와 그녀이니까.
사진설명: 엘리베이터 내부. 이십 년이 조금 넘는 호텔의 엘리베이터 내부가 완전 구닥다리 유럽풍이다. 페인트까지 일부러 여러 겹으로 칠해서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나마 아주 유럽은 아닌 것이 이층이 유럽식의 일층은 아니었다.
세 사람쯤 올라갔다 내려올 때쯤 내 차례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층에 내려서 좁고 기다란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방으로 들어갔다. (앗, 그리고 그사이에 건너편 방에 락아웃이 되어 못 들어가고 방문 앞에서 도어맨을 기다리고 계시던 어여쁘게 핸섬하신, 칵테일 한 잔 마셨다는, 내가 못 알아보는 셀럽의 분위기를 풍기시는 분과 웃기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게 플러팅인가 싶을 정도로… 얘야 내가 환갑이 한참 넘었어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ㅎㅎ) 방안에는 한편에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시는 일본사람인 듯한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내 소개를 하고 모델을 쳐다보았다.
앳되게 보이는 아시안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17살이고 중국에서 왔다고 하며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단번에 자기 남자친구가 한국에서 왔다면 반가워한다. 영락없는 우리나라 청소년 고등학생 같았다.
“흠… 노련한 미는 전혀 없군.”
“근데, 드레스는?“
핑크빛이 살짝 도는 하얀색의 잔잔한 구슬이 달린 부티나는 드레스였다. 정말 이뻤다. 드레스가.
“근데, 머리가???” - 노 코멘트!
나머지는 아래 왼쪽의 사진을 보시기 바란다.
어쨌거나, 나의 상상력을 총 동원해서 가녀리고, 청순하고, 아름다운 동양여인의 미를 찍어보려 노력했다. 마침 창 옆에 남미스타일의 가죽 벤치가 있어 그곳에 그녀를 앉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영… 분위기가 안 나왔다. 너무 어렸다고나 할까? “우아”(엘레강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오 분간 찍고 돌아 나왔다.
사진설명: 내가 이 머리 때문에 찍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뒷 배경은 사각형의 까만색 격자무늬, 머리는 30도, 45도 각도의 삐죽삐죽한 사선들, 눈 화장을 엄청나게 강조해서 얼굴반이 눈. 립스틱은 입술을 더욱 도톰하게 보이게 하였고… 전체적으로 얼굴 모습이 마치 어류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뒷배경이라도 정리해 보려고 이 친구를 소파에 앉히고 나는 푹신푹신한 소파 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세이지에 의하면 헤어와 메이크업을 한 일본사람들은 당시 뉴욕 패션계에서 너무 잘 나가서 예약을 잡기 힘들어 어렵게 모셔왔다고. 촌스러운 내가 그분들의 명성을 못 알아본 것이었다. 위 오른쪽 사진은 그중 내 마음에 젤 드는 이미지이다. 아마도 이 사진마저 없었다면 울었을 것 같다.
로비에서 기다리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니 약간 심상치가 않다, 어쩠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흠…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군. 다행이다.” (혼자서 한 말.)
그러면서 절친인 J의 얼굴을 쳐다보니…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됨)
두 번째 씬으로 들어간다고 세이지로부터 문자가 내려왔다.
두 번째도 비슷하게 찍고 다들 내려와서 마지막 사람까지 끝나길 기다리는데 마크가 내려왔다.
마크는 심상치 않은 얼굴로 모여있는 우리를 보며 어땠느냐고 묻는다. 아마 위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J가 사태의 심각성을 마크한테 전한 모양. 다들 젠틀맨이라 그러는지 서로 눈치만 보며 있길래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마크, 난 이렇게 뒷배경이 시끄러운 곳에서는 인물 사진을 못 찍겠어요. 프렌치윈도의 까만색의 굵은 창틀은 말할 것도 없고 모델의 머리는 또 그게 뭐예요? 붕어도 아니고.”
와글와글… 다른 팀원들도 점잖게 한두 마디씩 보탰다.
마크는 이런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는 게…
“촬영은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터질지 모른다. 그러니 각자 매 순간에 힘든 일들, 마음에 안 드는 일들, 최선을 다해서 풀어나가도록 하시라.”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같이 들렸지만 우리 모두는 다 들었다. 방법은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모두들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사진 설명: 이 친구의 오른쪽 팔 위의 흉터는 어디에 부딪친 자국 같았다. 소매 없는 드레스를 입으니 가릴 수가 없어서 조심해서 찍었어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래도 두 번째 씬은 약간은 참을만했다. 까만색 비즈 드레스가 역시 흰색보다 맵시가 나았다.
헤어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우리의 어린 모델까지 총 열 명이 기다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한자리에 모여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곳 레스토랑인 젬마(Gemma)는 소호에서 나름 유명한 곳으로 프렌치비스트로를 연상시켰다. 음식도 프렌치 스타일. 정말 뉴욕에는 없는 게 없다. 요즘은 뉴욕의 한국음식점이 한국보다 더 맛나게 나오니까 말이다.
드디어 세 번째 씬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일층 로비에서 기다리는 우리에게 세이지의 텍스트가 도착했다.
“이번 씬은 모델이 의자에 앉을 수가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굉장한 옷 이길래 그러지?” (이 사건 이후로 Met Gala에서 리한나의 옷같이 입으면 화장실도 못 갈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은 좀 괜찮았으면 좋겠다“ 하는 맘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들 찍고 내려와서는 좋았다고 하면서 만족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맨 마지막 순서
도대체 어땠길래 이번은 좋다고 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은 올라가서 다 풀렸다. 밥을 같이 먹어서일까? 모두들 많이들 느긋해진 모습이었고 특히 모델인 M은 완전한 변신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먼 극동에서 온 가녀린 꽃과 같은 아시안 여인이 아니었다. 많이 깔보는 말이지만 가끔씩 나도 듣는 Delicate Aisan Flower라는 속어가 있다. 정작 뜻은 너는 그렇지 않은 터프한 동양여자라는 말이다. 결국은 아시안 여자들은 가녀린 꽃으로 보인다는 얘기가 되고 근데 너는 아니다는 뜻이 되니까 “내 참! 기분 더럽네” 이거나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잘났냐?“ 는 말을 하게 된다.
사진 설명: M을 첨에 봤을 때는 마치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영화에서 본 화려한 황실의 여인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릿여릿하게 아름다운 그녀들 같이. 그러나 마지막 씬에서 커다란 까만색 비즈가 박힌 갑옷 같은 의상을 입은 M은 마치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투도 불사하는 강인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순간, 아차, 내가 이 친구의 참모습을 나의 선입감 때문에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구나. 나도 그녀를 delicate Asian Flower로 치부했었구나. 이것이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진짜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나의 행동 역시 달라졌다. 우선, 기절하게 싫었던 프렌치윈도는 두꺼운 태피스트리로 만든 커튼으로 확 가리고 그녀의 얼굴을 찍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좀 더 과감하게 초점을 흐릿하게도 샤프하게도 바꿔가며 여러 가지 테스트 겸 시도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싫던 프렌치 윈도도 조금씩 사진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아래 두 사진이 그런 경우다. 솔라라이제이션 효과가 심하게 나와서 손이 마치 파층류의 물갈퀴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알게 뭐나. 우선은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고 보자. 그래야 인지 아닌지 일게 되니까.”
결론은?
“다시는 이렇게는 안 한다.”
“ 그래도 기분은 좋다. 할 만큼은 다 해봤으니…”
이렇게 신니게 내 차례를 마치고 마크에게 바통을 넘기며,
“이제 당신 차례예요.” 라 하니, 마크는 갑자기 내가 쳐 놓은 커튼을 활짝 열어 놓으며,
“우린 이렇게 하자.” 말한다.
아래 사진은 내가 아이폰으로 눌러댄 당시의 모습이다. 옆에 서있던 세이지는 M에게
“이런 모습은 어때?”하며 자신의 폰으로 참고 사진을 보여 주었고, 마크는 M에게,
“그 번쩍번쩍한 옷을 입고 춤 한번 추어봐” 하고 있었고, 나는 마치 일렉트릭 기타를 튕기는듯한 동작을 하며 그녀에게,
“같이 한번 춰 봐!” 하였고 그렇게 마지막 촬영을 신나게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마크는 맘에 드는 사진을 건졌을까?
그건 잘 모르지만 아니었을 것 같았던 게, 역시 17살의 어린 학생은 그런 멍석이 깔렸을 때 마음껏 놀아볼 만한 배짱은 아직 없었던 것 같았다.
“뒷배경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헤어스타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메이크업이 내 사진의 퀄리티를 결정하진 못한다.“
번역하면,
였다고.
기어 인포:
라이카 Summilux M 35mm ASPH F1.4
+ LeicaM10R
iPhone 14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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